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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Log/이탈리아

[이탈리아 오르비에토 & 치비타 1] 유서깊은 바뇨레지오에서 치비타까지...

by Helen of Troy 2011. 7. 21.

 

Civita에셔...

 

 

지형이 험난한 오르비에토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구비구비 이런 길로 아래로 아래로...

 

이런 간이역을 세군데를 지나서...

 

매표소가 점심시간이어서인지 버스표를 팔지 않아서 사지 못해서 운전기사한테 직접 살 수 있는지 물어 보았더니

젊고 멋진 운전기사 청년이 씩 웃으면서 그냥 타라는 말에 우리 부부와 젊은 부부가 앞자리에 올라 타고...

 

더운데도 에어콘이 없이 대관령같은 길처럼 어지러울 정도로 이리 돌고 저리 돌아서 덜컹거리며 1시간을 타고 가다 보니...

 

바뇨레지오 와 치비타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버스 정류장 옆에 치비타와 바뇨레지오의 유래와 역사를 죽 소개 하고 있는 안내표지가 눈에 들어 왔다.

이 마을의 역사는 발굴된  유물인 화살과 도끼와 칼등에 미루어서 신석기 시대부터 존재해 왔음을 입증되었고,

간간히 발생된 화산폭발로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잘 발견되지 않았지만, 에투루스 인들의 무덤과 터전이 발견된 오래 된 마을이다.

에투루스 인들이 처음 자리잡은 치비타의 지형은 좁은 고원으로 적으로부터 방어하기가 수월하고

고원 양쪽에 강이 흐르는 지대로 자연적인 방어력과 필요한 수원지와 가까운 곳이기도 해서

오랫 기간동안 적에게 포위당해도 이겨 낼 수 있는 요새의 잇점을 지닌 곳이다.

 

불행하게도 이 지역은 잦은 지진, 화산 그리고 산사태로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소수의 유적들과 유물들로 미루어서 기원전 8세기에 현재의 위치에 "도시"라는 뜻을 지닌 치비타가

이미 존재했음이 기록에 남아있다.

 

바뇨레지오(Bagnoregio)마을의 어원은 Balneum regis에서 나왔으며

뜻은 왕의 목욕탕인데, 그 이유는 이 지역이 화산과 지진이 발생하는 지빙에서 흔히 보는 유황온천이 다수 있는데

한 임금님이 이 지역의 온천에서 상처와 피부병을 나았다는데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600년 경에 벌써 캐톨릭 교구가 존재할만큼 중세의 중요한 역할을 한 이 도시는

계속적으로 외부의 침략이 빈번했다.

고트족(493-553), 비잔틴(553-605)의 지배를 받다가 롬바르드(Larmbards)의 통치하에 있다가

774년에 프랑스의 살르망 왕이 바티칸의 영역으로 넘겨진 후에

드디어 1140년에 자유체재로 독립을 얻어내고 한동안 번성하기도 한 도시이다.

 

버스를 여기까지 함께 타고 온 러시아 출신에 MIT 공대를 졸업하고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콤표터 계통의 일을 한다는 Igor와 그의 아내인 미모의 Nadia 부부와

우리 부부가 치비타 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일단 내려서 치비타 꼭대기까지 가는 길을 일단 확인한 다음에...

 

젊은 부부는 우선 요기를 하고 떠나기로 하고, 우리 부부는 33도의 무더운 날씨를 감안해서 1 리터 물병 하나씩 꿰어차고 치비타로 향하는 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치비티로 올라가는 길 양쪽에 아름다운 꽃으로 둘러쌓인 오래된 집들이 눈을 즐겁게 해 준다.

 

수백년의 세월의 흔적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저 놀랍기만 한 그네들의 정겨운 집들....

 

견고한 집의 벽은 비록 낡았지만 새로운 창문들로 미루어서 집 안에도 편하게 거주하게 잘 개조되어있을 것 같다.

 

그런데 대문만은 옛것을 고수하나 보다...

 

오래 되고 딱딱한 돌로 지어진 집이 창틀마다 놓여진 화분으로 훨씬 부드럽고 멋진 조화를 이룬다.

 

아담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성당도 연륜이 배어서 편하게 기도를 바칠 수 있는 곳이었다.

 

편편한 평지가 거의 없는 곳이라서 어느 집이고 있는 층계에는 이렇게 화분들이 즐비하다.  오래된 벽에도...

 

이 건물엔 핑크빛 제라늄이 만발해 있어서 한낮의 무더위 탓인지 단 한명의 행인도 없는 길이 잠시 환해지는 듯....

 

아직은 완만한 경사진 길에 길게 난 벽돌에서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목도 심하게 말라 오지만 늘 화장실 걱정에 아껴가며 물을 마시면서 30분 이상 걸어도 단 한명의 사람 그립자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길에 발자국 소리가 크게 들리는 듯하다.

 

집 앞은 새로 plaster를 했는지 깔끔한데 집 옆과 뒤의 벽은 옛것 그대로이다...

우리처럼 미련하고 무식한 여행객들이나 더운 대낮에 뻘뻘 땀을 흘려가며 동네를 누비는 동안 아마도 주민들은 창이 열린 저 집안에서 느긋하게 시에스타를 즐기고 있나보다.

 

가파르게 경사진 층계 역시 세월과 사람의 흔적으로 삐뚤빼뚤 둥글게 마모되어서 조심스레 발을 내딛어야 했지만

탐스럽게 커다랗게 핀 수국에 이끌려서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살금살금 뒤뜰로 내려 가 보니...

 

가파른 산동네라서 높다랗게 지어진 축대 사이의 좁은 뒷마당엔 더 크고 탐스런 수국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1시간쯤 걸어가도 여전히 아무도 마주치는 사람이 없다.

갑자기 외계인들이 침범해서 주민들을 다 인질로 잡아 갔을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정도로 아무 기척이 없어서

적막감에 더 나른해지는 오후시간이다.

 

Church  of the Annunciation

 

성당 앞에 성 안토이로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1408)

 

성당 건너편에 독특한 벽 디자인이 있는 성모상이 있는 아담한 정원이 눈에 띄어서 잠시 화살기도도 바치고...

 

개인적으로 무척 맘에 드는 색상의 벽과 창문에 한참 눈길이 가고....

 

비록 인기척은 없는 길거리의 집앞에 이렇게 탐스럽게 피어난 수국이 한집건너 피어나서 지나가는 여행객을 반갑게 맞아주어서 덜 생소하다.

무척 싱싱하기도 하지만 남편의 손보다도 훨씬 큰 꽃송이가 경이롭기만 하다.

 

성당의 뒷쪽으로 보이는 종탑...

 

오른쪽 가파른 낭떠러지 위에 있는 수도원 뒷길을 걸어서...

 

오래괸 성벽을 뒤에서 귀가 따가울 정도로 커다랗게 울리는 매미 소리가  한낮의 더위를 잊게 해 준다.

 

이름모를 작은 성당도 지나가고...

 

높은 축대와 그 위의 나무들 덕분에 오랜만에 그늘진 길을 걸으니 한결 낫다. 

 

이 길은 오래된 나무들 덕에 길 한복판도 그늘이 져서 아무도 없는 길 바닥에 잠시 앉아서 물도 마시고 피곤한 발도 쉬고...

 

위의 길 끝까지 걸어 가보니 드디어 저 멀리 치비타가 눈에 들어 와서 절로 감탄사가 입에서 계속 나온다.

 

바뇨레지오 마을에서 치비타 입구 전에 이렇게 작지만 여러가지 음료수를 제공하는 카페가 있기에 우선 반가워서 무조건 들어갔다.

시원한 쥬스를 주문하고 바로 화장실이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매우 미안한듯히 카페 내에는 없다고 알려준다.

그리고는 그래도 쥬스를 마시겠냐고 물어보는 순진한 청년이 귀엽게 보였다.

엄청 더운 낮게 1시간 이상 오르막 길을 걸어왔는데도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는 남편...

 

높은 곳에 위치한 카페 주위에 내려다 본 풍경...

 

그리고 멀리 치비타도 보이고...

 

카페 앞 풀밭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쉬고 있는 남편...

사방이 탁 트여 있고 아름다리 나무가 제공해주는 그늘, 그리고 살랑거리는 바람에 땀 흘리고 올라 온 보람이 확실히 든다.

낮잠이라도 한숨 자고 가고 싶지만 멀리 보이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치비타의 모습에 발을 계속 재족했다.

 

긴 세월동안 지진과, 화산, 산사태 그리고 자연적인 풍화작용을 견디고 고고하게 여전히 버티고 있는 치비타에 눈을 떼어 놓을 수가 없다.

 

버스에서 내려서 여기까지 오면서 처음 마추친 벨지움에서 온 가족들과 서로 사진을 찍어 주면서...

 

지금까지 걸어 온 가파른 경사길보다 많이 완만해진 길이 무척 사랑스럽다.

 

멀리 정면으로 치비타기 드디어 눈에 들어 온다.

 

길가에 있는 이집의 늘어진 벤치와 벽마다 다양한 모습을 지닌 이집 덕분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와 있는 착각이 든다.

 

늘어진 전기줄만 없다면 어느 시대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우리라...

 

 

치비타를 이어주는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지진벨트 지역에 위치한 치비타는 1695년 6월 2일부터 7월 15일까지 계속된 지진으로

32명이 사망하고 동네의 전 주택이 심한 피해를 입는 사건후에도

십여차례의 지진으로 위의 다리도 수차레 파손되기도 해서

주교좌성당과 수도원들, 정부청사들이 안전한 곳으로 이미 이주한 상태인 1922년에

치비타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에게 대피명령이 떨어져자 서서히 주민들이 이곳을 떠나기 시작하는 불운을 겪는다.

하지만 이고장 출신인 작가 테키(,Tecchi)의 노력으로 새 삶을 되찾게 된다.

 

 

 함께 오르비에토에서 버스를 타고 온 러시아출신 신혼 부부와 서로 사진을 찍어 주면서...

 

 다리 한복판에서 보인 주위경치...

 

 성의 대문이 바로 올려다 보는 곳까지 다달았다.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닌데도 이렇게 유모차를 밀고 오는 가족들이 종종 눈에 뜨이는 점이 재미있기도...

 

Gate of Santa Maria (성모 마리아 대문) 앞에서...

이 대문은 이 성내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이며 바뇨레지오 주민들이 당시 군림하던 모달데스키 가족에 대항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두마리의 사자가 대문양편에 있고 가운데에는 Reginald Pole  추기경의 상징이기도 한 독수리로 꾸며져 있다.

이 13세기에 지어진 대문은 이미 1500냔 전에 에투루스인들이 이미 지어 놓은 입구에 지어진 것이 특이하다.

 

 대물 왼편에는 잔니 궁전(Palazzo Janni)의 폐허가....

 

 

 

다음편엔 성모 마리아 길(Via Santa Maria)를 걸어서 성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