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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Because..../Science·Math

달 착륙 50주년을 맞이해서 아폴로 11호의 배경과 과정, 업적과 유산을 되짚어 보다.

by Helen of Troy 2019. 7. 18.


아폴로 11호가 무사히 달 착륙에 성공한지 50주년을 맞이해서,

내 자신도 어릴 때에 일어난 사건으로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이 역사적인 이벤트와 관련된

배경과 당시 상황, 그리고 아폴로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과 업적을

 제대로 재조명 해 보고 싶어서

자료를 정리해서 포스팅을 해 보았습니다.


 

  50년 전 달 표면에 최초로 착륙한 닐 암스트롱

게티  이미지

 


1969년 7월 20일에, 아폴로 11에 탄 우주인들이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도 길이 남을 중요한 이벤트로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은 왜 달에 가려고 했을까?


1957년에 소비에트 연방국이 최초로 스풋니크(Sputnik) 위성을 성공적으로 쏘아 올린 후,

냉전이 고조되었던 당시 미국과 소련과의 우주로 향한 경쟁이 심화되었다.


1961년에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될 당시,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은 냉전의 최대의 적인 소련이 가진 

테크놀로지와 기술면에서 뒤진다고 믿고 있었다.




쏘련출신 우주인 유리 가가린(Gagarin)과 최초 여성 우주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Tereshkova) 활발하고 성공적인 활약은 

미국정부와 시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게티 이미지



그런 여론은 바로 1961년에 세계 최초로

쏘련이 인간이 동승한 우주선 발사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정부 차원으로 대대적인 지원에 들어 갔고,

1962년에 케네디 대통령이 지금은 유명해진 

"We choose to go to the Moon!"(우리는 달에 가기로 결정했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양국간의 우주경주는 계속 되었고, 1965년에 결국 먼저 달 표면에

무인 우주선을 성공적으로 착륙시켰다.




어떻게 미국은 성공적으로 아폴로 프로그램을 준비했을까?


미국의 우주기관인 NASA는 아폴로 프로그램을 위해서

약 40만명의 인력과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250억 달러(현시세로 약 1,600억달라)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을 이 프로그램에 정부 차원에서 투자를 했다.



새턴(토성) 5호 로켓 발사(The Saturn V rocket lifts off)



아폴로 11호 임무을 위해서 버즈 알드린(Buzz Aldrin),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과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 세 우주인이 선정되었고,

아폴로 우주선과 달 착륙 탐사선을 무사히 달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서

대단한 힘과 최첨단의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자랑하는 새턴 5호 로케트가 사용되었다.





아폴로 11 임무에 관련된 테크놀로지와 관련된 숫자로 알아보면...


74:  아폴로 11호 임무에 사용된 컴퓨터 ROM 메모리는

        불과 74 킬로바이츠(kilobytes)였다.


아폴로 프로젝트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달에 착륙한 달 탐사선에 장착된 고체(solid-state) 마이크로컴퓨터부터

거대한 IBM 컴퓨터은 물론, 플레쉬 전등부터 마그네틱 테이프까지 컴퓨터의 획기적인 발전이

아폴로 프로그램의 성공에 큰 뒷받침이 되었다.


아폴로 우주선이 384,400 km 떨어진 달까지 이동해서

계획된 지점에 안전하게 착륙하기 할 뿐 아니라, 다시 지구로 안전하게 돌아오기 위해서

우주인들은 AGC (Apollo Guidance Computer)컴퓨터 프로그램이 사용되었다.


이 AGC 프로그램은 MIT에서 개발되었는데,

수만개의 실리콘 칩스가 장착된 컴퓨터를 사용했다는데,

이 새로운 컴퓨터 테크놀로지 덕분에, 실리콘 밸리가 급성장했고,

현재의 대단하고 파워풀한 컴퓨터 테크놀로지 개발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되었다.


아폴로에 장착된 AGC 컴퓨터에 사용된 74 KB ROM 과 4 KB 메모리는

1980년대에 출시된 Commodore 64 홈컴퓨터에 장착된 것과 비슷해서

오늘날 수준으로 보면 너무도 하찮은 수준이지만,

결과적으로 유인 우주선이 성공적으로 달에  성공적으로 착륙하게 했다.


한편, 휴스턴에 소재한 NASA에서는 당시 막 개발된 IBM 360 컴퓨터 5대을 사용해서

리얼타임으로 우주선의 속도, 궤도, 우주인들의 건강등 모든 정보를 분석했다.


이처럼 아폴로를 성공적으로 이끈 최첨단 컴퓨터가 사용된 반면에,

당시 포켓 계산기가 개발되지 않았기에

우주인들은 19세기에 사용되었던 슬라이드 룰을 사용해서 간단한 계산을 해결했고,

항해 진로에 사용되었던 sextants(육분의)를 같은 목적으로 사용한 점이 재미나다.




1202: 컴퓨터 알람 코드


닐 암스트롱 우주인이 달 착륙선을 시도하기 위해서

착륙 엔진 버턴을 누른지 5분 후에

그의 헤드세트를 통해 1202 와 1201 위험신호 알람이 울리자,

그는 "Program alarm…it’s a 1202,”라고 콘트롤 센터에 보고했다.



1980대에 계발된 코모도어 64 컴퓨터에 사용된 메모리로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이 성공적으로 달에 착륙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게티 이미지



하지만 암스트롱씨와 콘트롤 센터의 리더인 찰리 듀크 둘 다

이 알람 코드의 의미를 몰랐기에, 임무를 중단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여서

한동안 긴장감에 휩쌓였다.

휴스턴에서도 이 날 전에 이미 며칠간 같은 알람 메시지가 떴는데도 불구하고,

아폴로 비행 리더(flight director)였던 제리 그리핀씨는

침착하게 우주인들에게 착륙임무를 계속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후에 이 알람의 의미를 분석해 본 결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컴퓨터의 활동이 최고에 달해서 과부하가 발생하면서

필요하지도 않은 계산까지 하게 되면서, 컴퓨터가

"나는 너무 바빠요. 그래서 맘대로 뭔가를 뱉어 냈어요." 라는 불평으로 판명되었다.





9 우주선에 가지고 간 카세트 테이프 숫자


아폴로 11호에 우주인들이 개인적으로 기록을 남기고 싶은 것들을 녹음하기 위해서

당시 막 개발된 소니 워크맨 카세트 테이프 녹음기를 가져 갔다.

이 녹음기로 임무에 필요한 기록 외에도 우주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도 했는데,

비행 중에 주로 컨트리 음악을 즐겨 들었다고 한다.





36: 아폴로가 쏘아 올린 위성의 무게 (kg)


NASA는 달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두개의 우주선을 궤도에 올렸는데,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폴로 15호 임무때에는

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달 궤도를 분석하기 위해서 추가로 위성을 띄어 올렸다.




지구 궤도를 6개월동안 머물렀던 위성을 쏘아 올린

아폴로 15호 우주인들
 (Credit: Nasa)

 

 

36 kg 무게와 육각형 모양의 이 위성은 우주에서

6 개월동안 수집된 다양한 정보를 지구에 보낸 후,임무를 잘 마치고 달 표면으로 떨어졌다.


1972년 4월에 발사된 아폴로 16호도 비슷한 위성을 궤도에 성공적으로 올렸지만,

불과 6주 후에 달 표면에 추락했다.




새턴 5호 로케트 발사에 사용된  컴퓨터는

현재까지 우주에 쏘아 올린  컴퓨터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

(Credit: Nasa)



22: 새턴 5호에 장착된 컴퓨터의 지름 (feet)


AGC는 컴퓨터의 극소형화를 불러 왔다면,

새턴 5호 로케트를 콘트롤하는 컴퓨터는

가장 규모가 큰 우주에 쏘아 올린 컴퓨터로 랭크되었다.

로케트 윗 부분에 장착된 이 컴퓨터의 지름이 22 feet 였다.


이 컴퓨터는 알라바마주의 헌츠빌에 소재한 로케트 팀 리더인

버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씨가 디자인해서 IBM 회사가 제작했다.

이 컴퓨터는 거대한 메인프라임 컴퓨터를 우주에 쏟아 올린 후 버리고 돌아 온 셈이다.




400,000: 아폴로 프로젝트에 투여된 인원 수


닐 암스트롱씨는 NASA 가 배출한 가장 뛰어난 우주인의 한사람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졌지만,

정작 암스트롱 자신은 그의 업적에 대해서 늘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대신 그는 그를 드러내는 일은 극도로 자제했지만,

아폴로 임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 준

수만명의 과학자들과 관련자들의 공헌과 수고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폴로 프로그램의 최정점을 찍을 당시에 미국 전역에 걸쳐서

총 40만명의 인력이 투여되었다.

이 숫자는 세명의 우주인들을 포함해서, 휴스턴 본부에서 진두지휘를 한 사람들,

우주선과 착륙선등 다양한 기계들을 제작한 회사관계자들, 엔지니어들,

과학자들, 의료진들, 수학자들 프로그래머등 모든 이들을 포한한 숫자이다.




달 착륙선이 성공적으로 착륙해서 단 한명의 우주인을 달 표면을 걸을 수 있도록

수만명의 전문 인력들이 참가했다.

 (Credit: Nasa)




38: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의 평균 연령


암스트롱씨가 인류 역사상 첫 달 착륙인으로 특별하게 선정되기 보다는
아폴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우주인들은 로테이션 형식으로 선정이 되는 시스템이어서,

단순히 아폴로 프로그램의 순열대로 선정이 되었다.

그래서 만약 아폴로 11호 임무가 불발에 끄쳤다면,

아폴로 12호의 리더인 피트 콘래드(Pete Conrad)에게 그 영광이 돌아갔을 것이다.


실제로 관련된 우주인들의 배경은 참 다양한데도 불구하고,

우연의 일치인지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은 여러모로 흡사한 구석이 많다.

세 우주인들 다 1930년에 태어났고,

다 군대 경험이 있으며, 파일럿 출신이며,

모두 독실한 크리스찬 신자였음이 흥미롭다.


암스트롱씨는 당시 38세로, 아폴로 프로그램의 리더 중 최연소였다.

한편 아폴로 16호 우주인 찰리 듀크(Duke)씨는 당시 36세로

최연소 나이에 달 표면을 밟은 우주인이 되었고,

1971년에 발사된 아폴로 14호 앨런 셰파드(Shepard)씨는

당시 47세로, 달을 밟은 최연장자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우주 프로그램의 최연장자는

미국인으로 우주에서 지구 궤도를 처음 회전했던 존 글렌(Glenn)씨로,

그는 1998년  '디스커버리' 우주선 프로그램 중에 9일간 참가해서

당시 그의 나이가 77세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아폴로 11호 우주인 버즈 올드린(Aldrin)씨가
달 착륙선 '더 이글(the Eagle) 주위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credit: NASA)



12: 달 표면을 밟은 우주인 숫자


11번의 아폴로 임무에 33명의 우주인이 참가했다.

그 중 27명이 달까지 도착했고, 24명이 달 궤도를 돌았지만, 12명만이 실제로 달 표면을 밟았다.


암스트롱이 인간으로서 달 표면을 처음 밟은 후, 그가 정작 무슨 말을 할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사전에 이에 대해서 누구와도 논의를 하지 않았는데,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한 인간의 작은 한 발자국이자, 인류에겐 거대한 도약이다.) 라는 유명한 그의 소감은

이 대단한 인간의 역사적인 순간을 표현하는 아주 적절한 말로 우리를 크게 감동시켰다.


그렇다면 인류 사상 두번째로 달 표면을 밟은 버즈 올드린씨의 소감은 무엇일까?

그는 "magnificent desolation."(멋진 황량함) 두 단어로 짧게 요약해서 소감을 밝혔다.




불과 12명의 인간이 달 표면을 밟았다.

(Credit: Nasa)


 

세번째로 달 표면을 밟은 단신의 피트 콘래드는
“Whoopie! Man, that may have been a small one for Neil,

but that's a long one for me.”(닐에겐 작은 발자국이였지만,

내겐 아주 긴 발자국이었다.)라고 개그 형식으로 소감을 말했다.


이렇게 인간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다수의 우주인들은

현실로 돌아온 후에 이혼, 우울증과 알콜 중독등

다시 사회에 적응하는데 여러 문제에 봉착해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왠지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에 가슴이 아프다.




닐 암스트롱의 오른쪽 발이 달 표면에 남겨진 자국

 Photograph: AFP/Getty






8: 아폴로 프로그램 임무 중에 사망한 우주인 숫자


1968년 10월에 세명의 우주인을 태운 아폴로 7호 발사 전에

이미 9명의 우주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첫번째 희생자는 Theodore Freeman(프리맨)씨로

1964년에 그가 T-38 제트기로 타고 우주 비행 연습 도중에

새와 충돌하면서, 카노피가 파손되고 엔진에 문제가 생긴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성공적으로 제트기에서 탈출했지만, 너무 지면과 가까워서

착륙하는 과정에서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1966년 2월 28일에 제미나이 9호 임무를 맡은 엘리어트 시(See)와 찰스 배셋(Bassett)

두 우주인들이 임무를 위한 트레이닝 중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안개가 짙은 활주로에

그들이 탄 T-38 제트기 착륙을 시도하다가 제미나이 우주선을 제작하는 공장건물에 충돌해서

순식간에 사망했으나, 기적적으로 지상의 인명피해는 없었다




1967년에 착륙선 지상 테스트 중에 발생한 화재로 세명의 우주인
거스 그리섬(Gus Grissom), Ed White(에드 화이트)
그리고 Roger Chaffee (로저 채피)가 사망했다.

 (Credit: Nasa)



 NASA는 1967년에 예정된 아폴로 1호 프로그램의 첫 우주선 발사를 위해서 준비 과정 중,

자주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알고  화가 난 프로그램의 리더 우주인인 거스 그리샴씨는

아폴로 시뮬레이터(simulator) 바깥에 레몬을 달아 놓기도 했다.

그해 1월 27일에 세 우주인 그리샴, 화이트와 채피씨는 우주선의

전면적인 풀 테스트를 하기 위해서 산소로 그득 채워진 우주선에 올라 탔다.


하지만 이 테스트는 실패로 돌아갔고, 켑슐 안에는 독한 개스로 차 올랐지만,

프로그램 콘트롤 센터와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자,

"이렇게 두 세개의 빌딩 사이도 연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달까지 가겠냐?"라고 쏘아 부친 후

바로 "Fire, I smell fire."라는 말을 한지 몇 초 후에 화염에 휩싸이면서 전원이 사망했다.


이 참사로 아폴로 프로그램 자체를  완전히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전보다 훨씬 안전한 우주선 개발로 이어져서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같은 해에 클립튼 윌리엄스씨가 또 다른 T-38기의 추락사건으로,

그리고 에드워드 기븐스(Givens)가 사고로 사망해서

총 8명이 목숨을 잃었다.(쏘련은 6명의 우주인이 임무 중 사망)

아폴로 15호 임무 중에 아깝게 사망한 우주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 플래크를

달 표면에 남겨 두고 돌아왔다.




인간의 달 착륙을 시도하기 위한 트레이닝 중에 사망한

14명의 우주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플래크와 

그 우주인을 상징하는 모형이 달 표면에 남겨졌다.

 Photograph: Paul Van Hoeydonc





1: 아폴로 11호 발사 콘트롤 방에 참가한 여성 숫자


아폴로 11호 임무중 우주인부터, 휴스턴 본부 콘트롤 방의 직원과 과학자들,

심지어 TV 앵커들까지 다양한 분야에 투입된 많은 사람들 모두가 남성이었다.

유일하게 예외로 세 우주인들의 아내였을 정도로 남성이 이 분야에 독점했던 당시에

뒤에서 눈에 띄지 않게 아폴로 임무를 성공으로 이끈 비서, 간호원, 수학자, 프로그래머등

수많은 여성들의 활약이 뒷받침 해 주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폴로 발사의 콘트롤 방에 유일하게 참가한 여성이었던

조앤 모건(JoAnn Morgan) 씨를 찾아 보세요.

 (Credit: Nasa)



그런 상황에서 컴퓨터와 계기 콘트롤러로 활동했던 조앤 모건씨가 유일한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21개의 채널을 이용한 모든 커뮤니케이션과

새턴 5호 로케트의 모든 모니텅링 시스템의 상태를 관장하는 일을 수행했다.

그녀는 남성의 영역인 환경에서 몇 안되는 고위급 여성 과학자로 일을 하면서

거대한 3층 건물에 여성 화장실이 고작 1개밖에 없는 열악한 업무 상황과

여성비하적인 언어와 행동에 늘 시달렸고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이를 이겨내고 주어진 임무를 훌륭하게 이행한 여성으로 우뚝 섰다.




1960년대에 NASA에서 아폴로 임무를 위한 컴퓨터에 사용된

소프트웨어 계발에 리더로 참여한 마가렛 해밀턴(Hamilton)



그리고 2016년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시민들에게 수여되는

가장 권위있고 최고인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상을

21명의 미국 시민에게 수여한 행사에서 당시 80세된 해밀턴씨에게 이 메달을 수여했다.


해밀턴씨는 24세에 수학학위를 받은 후에 당시 하바드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려고 MIT 팀원으로 잠시 합류했다가

남편이 공부를 마친 후, 다시 수학박사 공부를 하려던 그녀에게

MIT 가 그녀를 아폴로 우주 프로그램 팀에 남아있으라는 제의를 받아 들여서

당시에는 완전 새로운 분야인 소프트웨어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소프트웨어의 선구자역을 맡았던 마가렛 해밀턴씨에게

거의 50년이 지난 2016년에 자유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그녀는 그렇게 아폴로 우주선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팀에 활동하기 시작해서

우주선에 장착된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개발을 맡은 MIT팀의 리더까지 올라가서

NASA의 성공적인 임무를 이끈 대단한 여성이다.


특히 달 착륙선이 1969년 7월 20일에 달 표면에 착륙하던 당일에

다수의 문제를 경고하는 알람이 울린 상황에서도,

그녀가 미리 일어날 여러 상황에 대처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덕분에

무사히 착륙에 성공으로 이끈 공적으로 5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에

늦게나마 그녀의 업적을 높이 사서 권위있는 대통령상을 받게 되었다.





24: 아폴로 7호에 가지고 간 감기 알약 숫자


1968년 10월 11일에 발사된 아폴로 7호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인 우주선이 지구 궤도를 성공적으로 도는 기록을 세웠다.

아폴로 7호의 대장이자 경험이 풍부한 우주인 왈리 스키라(Schirra)씨와

함께 동승한 돈 아이젤(Eisele)와 월트 커닝햄(Cunningham)씨는

달 표면에 첫 착륙할 우주인으로 기대를 받았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발사 불과 몇 시간 후에 그는 감기몸살로 앓기 시작해서

수시로 클리넥스 휴지를 사용해서 코를 계속해서 풀어서

켑슐 곳곳에 그가 코 푼 휴지가 돌아 다니거나 쳐박혀 있는 상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는 감기 때문에 피곤해 했고, 쉽게 화를 내기도 해서

우주인들간의 원활한 소통에도 문제를 초래하게 되었다.





아폴로 7호 대장이었던 왈리 스키라씨는

우주비행 중에  감기를 실제로 앓아서 고생을 한 우주인이 되었다.

(Credit: Nasa)



우주에서 임무 수행 중에 스키라씨는 지상의 콘트롤 센터에서 내리는 명령에도 불복하기도 하고,

주어진 업무 수행과정에 관해서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고,

머큐리 7호에서 함께 한 임무를 수행했던 동료 우주인이자

그의 보스인 디크 슬레이턴(Deke Slayton)에게 대놓고 화를 내기도 했다.

11일간 지구 궤도에서 성공적인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아폴로 7호 프로그램은

누가 봐도 성공적이었지만, 우주선의 대장의 자질과 건강 상태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임무였다.


스키라씨는 임무 중에 가지고 간 24개의 감기약(decongestant) 모두 복용했지만

악화된 그의 몸 상태와 기분은 멤버들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친 임무 때문인지

세 우주인들 모두 이후로 우주 프로그램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특정 음식들은 좁은 공간에서 우주복을 늘 입고 오랫동안 활동하는 우주인들의

배를 거북하게 하는 가스를 많이 배출해서 우주인들에게 불편을 주기도 했다.

(Credit: Nasa)




150: 달 표면에 발을 디딜 당시 암스트롱의 맥박 수


아폴로 11호 대장인 닐 암스트롱씨는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황 속에서도

아주 냉정하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나는 것을

이미 위험수위가 아주 높은 다양한 테스트 비행중에도

맥박수가 분당 71을 유지해서 그의 침착성을 이미 인정받았은 바 있다.


7월 20일에 본 우주선에서 암스트롱와 올드린씨가 탄 착륙선이 분리되어서

달 표면에 서서히 착륙하는 과정에서도 암스트롱의 맥박수는 110으로

크게 염려할 수치는 아니었다.




평소에 극박한 상황에서도 일분에 맥박수를 70으로 유지했던 암스트롱씨도

달 표면에 착륙 직전에 높이 치솟았다.

 (Credit: Nasa)



하지만, 갑자기 다수의 알람이 울리기 시작하자, 그의 맥박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가,

"go'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잠시 수치가 내려갔지만,

이미 예전에 예정된 착륙 지점에 가까워지면서

그 지점에 큰 돌들로 덮힌 것을 발견하게 되자, 다시 그의 맥박수가 증가했다.

그들이 약 착륙 지점에서 600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그의 맥박수는 120이었고,

300 미터 지점에서는 150까지 치솟았고, 착륙할 때까지 그 수치가 지속되었다.


달 표면에 성공적으로 착륙한지 2분 후에 본부 콘트롤 센터에서 'stay' 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긴장감이 완화되면서, 그의 맥박수도 평상시로 돌아왔다고 한다.

참고로 달에 착륙한 우주인들 중에 가장 높은 맥박수는 170에 달했다고 한다.




0.2: 아폴로 11호를 탄 우주인들이 임무중에 받은 방사선(rad) 수치


미국이 쏘아 올린 첫 위성인 엑스플로어(Explorer) 1호는 지구 주위에 

밴 앨런 벨트(Van Allen belts)라고 불리우는 강력한 방사선 구역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리 이 지역을 빠른 속도로 지나도 우주인들이 지구에서 달까지 

그리고 다시 지구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다가 1966년에 쏘련이 쏘아올린 위성 우주선에 동승한 두마리의 개가

큰 피해없이 이 벨트를 통과해서 살아서 돌아왔지만,

NASA의 의사들은 인간에게 이 방사선의 위험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다.


이미 성공적으로 발사된 제미나이 7호선에 14일간 탔던 프랭크 보먼(Borman)씨와

아폴로 7호에 탑승해서 지구궤도를 돈 우주인들은 우려했던 것과 달리

강력한 방사선의 피해를 입지 않은 듯 해 보였지만,

아폴로 8호의 대장인 보먼씨가 지구 궤도를 벗어나자, 구토하기 시작했는데

방사선의 영향으로 우려했지만, 다행히도 무중력 상태에 처한 우주인들이

흔히 겪는 일로 밝혀졌고, 보만씨도 곧 평소의 상태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폴로 11호의 비행 기록에 따르면, 탑승했던 우주인들은

0.2 rad 에 달하는 방사선에 노출되었는데, 이는 의학적으로 안전한 수치였다.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을 싯점으로

우주 비행을 마친 우주인들은 지구로 귀환한 후

(Credit: Nasa)



21: 임무를 마친 우주인들이 격리된 날 숫자


아폴로 11호가 무사히 태평양 바다에 떨어진 후에

가족이나 관련자들이 포옹이나 키스로 우주인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대신에

배를 타고 도착한 구조팀이 다가 와서 배의 뚜껑문을 열고 

생물학적으로 보호해 주는 특수한 수츠를 던져 주고 바로 문을 봉인하면

던져진 이 수츠를 입고 나서야 비로서 켑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보호 수츠를 입은 우주인들은 바로 헬리콥터를 타고 근처 해상에서 대기 중인

USS Hornet 항공모함으로 이동해서 미리 설치된 특별한 Airstream 카라반에 들어가서야

보호 수츠를 벗고 정상적으로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은빛을 띈 이 Airstream은 모바일 격리 설비라는 뜻을 지닌 

MOF(Mobile Quarantine Facility)로 알려졌는데,

이는 달에서 의도치않게 도입된 바이러스, 박테리아등 세균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고,

아울러 우주인들이 편하게 휴식할 수 있고 우주여행 중에 얻은 예상치 못한

여러 문제들을 모니터링할 수 있기도 한 장비이다.




휴스턴의 콘트롤 센터와 달 궤도를 돌던 서비스 모듈에서 포착된

달에 착륙한 착륙선(lunar module)의 모습



아폴로 11호 임무 후에 우주인들이 머물렀던 Airstream 은 

2차 세계 대전에 큰 활약을 했던 USS Horent 항공모함은 

캘리포니아주의 오클랜드에 소재한 해양 박물관으로 영구 변경된 곳에 전시되었고,

아폴로 14호때에 사용된 MOF는 항공모함의 격납고에 전시되었다.


많은 우여곡절끝에 암스트롱과 올드린 두 우주인히 무사히 달 표면에 착륙한 후

2시간 이상 착륙선 바깥에서 달 표면에서 샘플을 채취하고, 사진도 찍고,

다양한 과학적인 실험을 실행했다.

달 표면의 분선과 탐사를 마친 우주인들은 서비스 모듈에 성공적으로 도킹을 했다.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7월 24일 태평양 바다에 떨어진 후,

 구조된 세명의 우주인들의 모습



아폴로 11호가 무사히 달에 착륙한 모습은 세계 전역에 걸쳐서 

약 6억 5천만명의 사람들이 자그마한 티비를 통해서 지켜 보았고,

미국은 미국의 위대함을 세계 널리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아울러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사건, 주요 도시의 인종차별로 잦은 시위,

월남전 개입등으로 1960년대에 실추된 미국민들의 자존심을 북돋워 준 좋은 계기가 되었다.





아폴로 11호가 실제로 달에 착륙했는지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1972년까지 미국의 아폴로 프로그램으로 여섯번에 걸쳐서 달 착륙애 성공했다.

하지만 이 착륙은 허위이며, 미국이 꾸민 음모라는 설이 오랫동안 떠돌았다.


하지만 NASA가 2009년에 달 주위를 탐사와 정찰 목적으로 발사된 

우주선이 보내 준 다양한 정보 중에

이전과 달리 해상도가 아주  높은 사진속에 아폴로 11호를 비롯한 여섯번의 착륙 중에 남겨진

발자국들과 차의 바퀴들이 선명하게 담겨 있어서 이 음모론을 일축하게 되었다.


아울러 달 표면에서 채취된 암석의 분석결과

실제로 달에 서 채취된 샘플로 확인되어서

아폴로의 우주인들이 셀제로 달에 착륙한 것으로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무사히 귀한한 우주인들을 환영하기 위해서 펼쳐진 카 페레이드




과연  우리에게 달 착륙의 의미는 무엇일까?


현재까지 인간이 무사히 달 착륙에 성공한 국가는 미국에 국한되었지만,

러시아, 중국, 유럽의 ESA, 이스라엘과 인도가 달의 궤도에 무인 탐사선을 올렸거나

달 표면에 성공적으로 착륙시켜서, 우주 탐사의 엘리트 멤버쉽을 따 내면서 

그들의 테크놀로지의 우수성과 힘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그 예로 중국은 이미 아직도 인간에게 표출되지 않은 달의 다른 면에 도달하게 되면서

늦게나마 중국의 위상을 높여 주었다.


이렇듯 우주의 경쟁의 성공은 한 국가의 위상을 높여주기 위한 것 외에도

달의 두 극 지역에서 로케트 연료로 쓰이는 수소와 산소의 발견되어서

우주 비행에 필요한 자원 조달에 도움을 줄 수 있기도 하고,

금, 플래티넘과 희귀 금속들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아직 어떤 방식으로 채광할지는 모르지만,

긴 안목으로 볼 때에 그 국가에게 실질적인 돌아 올 실질적인이유도

이런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하는 장기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지난 7월 16일 화요일 밤하늘에 달 착륙 50주년을 기념하는 듯...


영국의 웨스트 요크셔의 토도모르든에 위치한

스투들리 파이크 위에 개기월식 현상이 펼쳐지고 있다.

Photograph: Danny Lawson




이탈리아의 로마에 위치한 콜로세움 위 밤하늘에 신비로운 개기월식이 선 보였다.

Photograph: Andrew Medichini





50년 전에 인간의 달 착륙을 위해서

 희생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면서,

요즘처럼 과학발전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시기에

앞으로 50년 후에 인간들이 펼칠 우주탐험이

 과연 어느 수준까지 도달할지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아마도 사람들이 지구와 달 사이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시대에

고 있을거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