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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Log/프랑스

[프랑스 여행63]몽마르뜨르에 위치한 성심(사크레 커) 대성당 1편 Basilique du Sacré-Cœur

by Helen of Troy 2021. 6. 7.

 

몽마르뜨르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성심 바실리카 대성당/Basilique du Sacré-Cœur

(2017년 6월 29일)

 

 

 

몽마르뜨르 언덕에서 예수성심 바실리카의 돔이 보인다.

 

 

 

성당 바로 앞에 Wallace Fountains/월러스 분수가 기다리고 있다.

 

월러스 분수는 시민들에게 마실 물을 제공해 주는 분수로

리처드 월러스 경이 디자인하고,

르부르크/Charles-Auguste Lebourg가 무쇠 소재로 주조해서

파리 시내 곳곳에 사람이 많이 다니는 지역의 보도에 설치되었다.

 

이 아름답게 제작된 분수는 널리 잘 알려졌고,

파리를 상징하는 심볼중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분수 제작 비용을 기부한 영국 출신 월러스 씨의 이름을 따서

분수 이름이 붙여졌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으로 피폐된 파리는 

당시 부유한 부르조아들이 사회의 하류층을 위해서 자선 사업을 행하던 것이

유행처럼 번진 덕분에, 적십자사와 구세군 단체를 비롯해서

사회사업을 벌이는 비영리단체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도 해 준 덕분에 다행히도 빠르게 복구되었다.

 

파리 사회를 위해서 앞장선 자선가들 중에 하나인 월러스 경(1818-1890)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가장 활동적으로 자선사업을 했는데,

1870년에 아버지로부터 큰 유산을 물려받은 것을

전쟁으로 허덕이는 파리 시민들을 위해서 기부할 뿐 아니라

전쟁으로 런던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숨어 지내기보다는 

그를 필요로 할 때마다 파리로 달려와서 파리 시민들 사이에 인기가 아주 높았다.


그는 병원을 개설해서 전쟁 중에 폭격으로 부상당한 이들을 치료해 주고

아울러 사는 데 필요한 생활필수품들을 제공해 주는 등

그가 제2의 고향과 다름없는 파리 시민들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선 그는

죽은 후에 페레 라세이트 묘지/Père Lachaise에 묻혔다. 

 

 

월러스 분수

 

그가 파리 시민을 위해서 많은 업적을 이룬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월러스 분수이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 중에 파리가 포위되면서,

파리에 존재하던 다수의 송수로들이 파괴되자,

이미 가격이 오른 물값이 더더욱 높아졌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난한 시민들은 세느강에서 조달된 물을

돈을 주고 사 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오염이 심한 강물보다 오히려 맥주나 

물값처럼 싼 다른 알코올 음료수들이 안전하기에

알코올 중독자들이 증가하게 되면서,

월러스 경은 가난한 자들만이 아니라 중산층 시민들과

홈레스들, 그리고 파리를 방문하는 누구라도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무료로 제공해 주는 분수들을 

기능적인 측면만 아니라 예술적인 측면까지 고려된 디자인이 가미된

분수를 조각가 오귀스트 레부크르에게 의뢰해서 파리 전역에 설치되어서

100여 년 이상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마실 물을 제공해 주고 있다.

 

 

 

성당 앞 광장에 다다르니

바로 파리 시내가 훤히 다 내려다 보인다.

 

 

파리에서 제일 높은 곳인 몽마르뜨르 언덕에 

방문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설치된 Fence에 올라서 파리 시내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대성당의 계단에 오르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뒤에는 언덕 위에 예수 성심 바실리카의 멋진 모습이 기다리고 있다.

 

 

파리 몽마르뜨르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성심 대성당/바실리크 듀 사크레 커/Basilique du Sacré-Cœur 은

예수님의 성심에 헌정된 대성당으로 파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파리 시내가 사방으로 훤히 내려다 보인다.

 

이 대성당은 파리 시내에서 두 번째로 방문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1885년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신비한 성체 조배가 이어지고 있는 곳으로

이 성당을 방문한 캐톨릭 신자들은 잠시라도 성체 조배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성심 바실리카는 폴 아바디/Paul Abadie 가 디자인을 맡았고,

성당 건축 공사는 1875년에 시작해서, 40년 후인, 1875년에 완공되었지만,

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후, 1919년에 정식으로 예수 성심에게 헌정되었다.

 

 

 

사크레-커 바실리카 성당의 입구

 

이 바실리카는 종교적인 유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유적으로

1870년에 발생한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가 

전쟁으로 인해서 발생한 피해자들에게 참회를 상징하는 유적이기도 하고,

1871년에 파리의 사회주의적인 공동체의 활성화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어졌다.

 

 

 

Sacré-Cœur 바실리카 공사 현장, 10 March 1882.

 

 

 1897년 공사 현장 모습

 

프랑스혁명 후 수 십 년간 프랑스 사회는 독실한 캐톨릭 신자들과 왕정을 지지하는 그룹과

민주주의자들, 비신자들, 사회주의자들과 혁명주의 신봉자들 그룹으로 나뉘어서 골이 깊어져 갔다.

1870년에 나폴레옹 3세는 바티칸을 보호하는 프랑스 수비 군대를 철수시키고,

대신 프랑스-프러시아 전쟁 전선에 투입했지만 결국 1871년에 프러시아에 패했고,

1870-71년에 사이에 파리 내에서 시민들의 폭동사건까지 발생하면서

프랑스, 특히 파리가 아주 어수선했다.

 

 

 

성당 왼편에 위치한 성 피터 채플/St. Pierre de Montmartre

 

 

 

성당 안에 들어서니, 제대 위에 높다란 돔 지붕이 인상적이고

베니스의 성 마르코 대성당의 내부와 흡사하다.

 

몽마르트르 지역에서 시민들의 폭동이 제일 먼저 발생했으며, 

이 사건 중에 당시 파리의 대주교였던 조르쥬 다르보아/Georges Darboy를 살해하면서

순교자가 되었고, 그의 후계자 기베르/Guibert  대주교는 1872년 10월에

높고 가파른 몽마르뜨르 언덕/Butte Monmartre을 오르던 중,

구름이 넓은 하늘이 파노라마처럼 퍼지는 계시적인 비전을 경험하게 되자,

"바로 이 곳에 순교자들이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예수 성심이 있어야 할 곳이며

그래서 신자들이 이 곳에 와서 경배할 수 있다." 라고 밝혔다.

 

 

 

 

 

 

 

영세식에 사용되는 분수/Baptismal Font

 

 

 

성모 마리아상과 그 앞에 놓인 수많은 촛불들

 

1873년 5월 24일에 아돌프 티에르와 그의 내각이 사표를 던지자,

프랑소와 피 주교는 프랑스 전역에 신앙의 갱신의 필요할 상황에 놓였음을 강조하자

제3 공화국의 "도덕적인 정부'는  종교적으로나 실추된 국가의 위상을

갱신하는 프로젝트 시행에 착수했다.

이 프로젝트는 왕정을 다시 도입하고, 로마(바티칸)를 수호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바로 사크러 커 바실리카가 이 프로젝트의 상징적인 표징이 되었다.

 

 파리의 대주교가 프랑스-프러시아 전쟁 중에 사망한 58,000명들의 영혼을 기리고,

몽마르뜨르  폭동의 만행을 속죄하기 위해서 성심 바실리카 건립 제안을 받아들인

프랑스 국회는 1873년 7월 24일에 성당 건립을 수락했다.

성당 건립 기금은 프랑스 전역에 위치한 성당에서 조달되었고, 완공까지 거의 40년이 걸렸다.

 

 

 

 

파리 시의회는 바실리카가 들어 설 땅으로 

몽마르뜨르 언덕 꼭대기를 제공하는 법을 통과하자

바실리카 디자인 공모전에서 77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건축가 폴 아바디/Paul Abadie 씨의 디자인이 채택되었다.

 

바실리카의 첫 주춧돌은 1875년 6월 16일에 드디어 놓여졌지만,

여러가지 법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인 갈등으로 발생된 문제로 공사가 지연되기도 했다.

대성당 건축 공사는 1914년에 완성되었지만, 1차 세계 대전 발발로 말미아마

종전이 된 후 1919년에 공식적인 헌정되었다.

 

 

 

 

 

 

바실리카 공사에 투입된 금액은 약 7백만 프랑으로 추산되는데,

이 기금 전체는 정부나 교구 차원이 아니라, 온전히 개개인이 내놓은 헌금으로 충당되었고,

건축 공사 초반에 이미 필요한 기금이 조성되었다.

1876년 3월에 임시 채플이 완공되자, 이 곳을 찾는 순례자들이 기부한 기금으로 공사가 진행될 수 있었다.

 

바실리카의 건축 양식은 당시 보편적이 아닌 로마노-비잔틴 양식에 의거해서 지어졌고,

프랑스를 상징하는 디자인이 곳곳에 볼 수 있다: 세개의 아치로 구성된 주랑 현관/portico는

프랑스인들이 존경하는 말을 탄 쟌 다르크 동상, 성 루이 9세 국왕 동상이 들어서 있고,

사보이 지역 합병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조된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사보이아르드 종이 그 예이다.

 

 

 

대성당 한 가운데에 제일 높은 돔이 자리잡고 있다.

 

 

제대앞 복도

 

 

 

입구 위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갠과 로즈 창

 

 

 

 

 

 

제대 위의 돔은 베니스의 성 마르코 성당이나

이스탄불에 위치한 아야-소피아 성당과 비슷하게

화려한 색상으로 비잔틴 양식으로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동상

 

 

파우의 성 안토안/St. Antoine de Padoue

 

 

제대 위 천장 돔의 일부

 

 

 

 

 

 

 

 

채플과 그 위의 돔

 

 

 

 

 

 

십자가의 길 14처 중

1처:  예수님 사형선고를 받다.

2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다.

 

 

 

 

 

십자가의 길;

5처: 사이린의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지다.

6처: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다.

 

 

 

 

 

 

 

 

십자가의 길

7처: 예수님이 두 번째 넘어지다.

8처: 예수님 예루살렘의 여인들과 만나다.

 

 

 

 

 

 

 

 

 

성인들과 천사들이 묘사된 돔

 

 

 

 

 

 

 

 

 

 

 

 

 

 

 

 

 

십자가의 길 14처

9처: 예수님이 세 번째 넘어지다.

10처:  예수님 옷을 빼앗기다.

 

 

 

 

 

십자가의 길 14처

11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못 박히다.

12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다.

 

 

십자가의 길 14처

13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다.

14처: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다.

 

 

 

 

 

 

계속해서 성심 성당 2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