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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s Family/Jeanie Marie

제 1회 세계 조산아의 날에 악몽같은 2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by Helen of Troy 2011. 11. 18.

 

 

어제 아침에 평소에 그래 왔듯이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다가 우연히 기사 하나가 눈에 번쩍 들어 왔다.

앞면에 커다란 headline 과는 거리가 멀게 한 기퉁이에 작게 나온 기사의 내용은

매년 전 세계적으로 13,000,000 명의 아이가 조숙아로 태어나며

그 중에서 1,000,000 명이 넘는 아가들이 여러가지 문제로 사망을 하는 사태의 심각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하고 

임산부들의 좋은 생활습관 교육과 좋은 영양섭취를 도와서

조산아들의 출산을 미리 방지하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하고,

이미 태어난 조숙아들을 건강하게 잘 키우는 의술 개발과

그들이 정상적으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조기교육 방침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올해 처음으로 11월 17일을 세계 조산아의 날로 제정되었다는 기사내용이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24년 전 무난히 더웠던 그 여름이

오래 된 영화관에서 낡은 필름이 힙겹게 소리를 내면서 돌아 가듯이  활동사진처럼 눈 앞에 천천히 돌아가면서

당시의 상황들이 느릿느릿하게 돌아 갔다.

  

한물간 영화처럼 우리들에게 잊혀져 가는 필름의 주인공은 바로 나의 큰딸이고,

우리 부부와, 많은 의료진들, 봉사자들은 조연으로 출연하는 휴먼 도큐멘타리 이다.

1987년, 24년 전에 큰딸이 무엇이 그렇게 급했는지

13주나 빨리, 27주째 고작 950 그람으로

힘들게 서두르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기억이 새롭게

 

당시 나는 뉴욕에서 소위 남들이 부러워하는 잘 나가는 직장을 다녔는데

하는 일자체가 여러나라로 출장이 잦은데다가 업무량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는 제일 위험 할 수도 있다는 첫 3개월간은 업무량도 많이 줄이고,

출장은 아예 남에게 맡기고,현장업무와 trade show 도 부하직원들에게 일임을 해서

나름 예비엄마 역할을 했다.

다만 극심한 입덧으로 부억에도 못 들어가고, 냉장고 문도 못 열 정도로 비위가 약해지고.

음식을 먹기만 하면 거의 다 토해내느라 늘 주린 배를 움켜지고 유일하게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는

수박으로 연명을 하면서 오히려 바쁜 일을 하다보면 입덧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직장에서 일에전념했다.

 

임신 중에 그래도 제일 안전하다는 4-6개월이 다 끝날 때 즈음에

매일 집과 직장만 조신하게 다니다 보니 조금은 따분하기도 해서 바람도 쏘일 겸

당시 North Carolina에서 박사공부를 하고 계시는 시아주버니 부부를 만나기 위해서

차를 몰고 이틀을 Chapel Hill에서 머물다가

버지니어에 있는 식민지 수도였던 williamsburg 으로 함께 가서멋진 독립일 기념 불꽃놀이까지 잘 구경하고

오랜만에 일상을 벗어난 덕분에 오래만에 음식도 먹어가면서 뉴져지에 있는 집으로 무사히 잘 돌아 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 와서 삼일째 아침부터 허리와 배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아직 예정일이 3개월도 더 남았기도 했고,

네게는 첫 임신이라서 labor (진통)의 통증을 잘 모르기도 해서

자꾸 화장실만 오후 내내 오락가락하기만 했다.

그 통증이 산통이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응급실로 가서 단 며칠이라도 출산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는

후회와 죄책감으로 오랫동안 시달리기도 했다.

 

저녁 6시 후부터는 통증도 점점 심해가고

급기야는 심하게 하혈이 시작되자 그제서야 집에서 15분 거리의 병원 응급실로 달려 갔다.

응급실 의사들 여러명과 인턴들에게 둘려 쌓여서 초음파검사와 태아의 맥박등을 체크하더니

labor를 멈추기엔 이미 늦었고,

당장 당면한 문제는 조산의 원인인 태반이 이미 조금씩 자궁벽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어서

진통이 있을 때마다 너무도 심한 출혈을 많이 한 산모부터 처치를 해야 하고,

그리고 태아를 살려 보겠다고 진통으로 신음을 하는 내게

아주 냉냉하게 사무적으로 알려주면서

이런 저런 위험시에 병원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동의서에 서명을 하라고 종이를 내밀기에

기가 막혔지만 하는 수없이 사인을 한 후에 바로 수수실로 들어 갔다.

 

몇분마다 주지적으로 오는 진통때마다 생 살이 떨어져나가는 극심한 통증에

고통을 이겨내려다가 나도 모르게 주위에 죽 둘러 선 의사 중에 누군가의 손을 붙잡았어니

따뜻하게 위로의 말은커녕 오히려 야멸차게 손을 뿌리치는 것이 아닌가...

육체적으로 너무도 고통이 크고,

정신적으로는 너무도 불안하고 무서워서 이성을 잃을 지경인데

이렇게 차거운 그들의 태도에 얼마나 서럽고, 화가 났는지

그 동네 사는 내내 그 병원 근처를 가도 절대로 그 방향을 보지도 않고,

어떨때는 일부터 멀리 돌아가기도 했을 정도로 마음의 상처가 꽤 깊었다.

 

 

그날 밤 늦게, 많은 사람들의 걱정 속에 큰딸이

울지도 못하고 축 늘어져서 고작 950 그람으로 이 세상에 힘들게 태어났다.

큰딸이 태어난 병원은 초 미숙아들을 돌보는 NICU 가 없어서

바로 인근에 있는 Jersey City Medical Center 병원의 transport 의료진 팀이 이미 연락을 받고 달려 와서

앰뷸런스로 딸아이를 바로 데리고 갔다.

데리고 가기 전에 의사 한분이 아이를 한번 보겠냐는 말씀에

바로 No!! 라고 힘없이 대답을 했다.

만약에 큰딸이 잘 못 되기라도 하면

그 아이의 모습이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을 것 같아서

무의식적으로 미리 나를 보호 하려고 세상에 처음 태어난 딸을 그렇게 외면을 했던 것 같다.

남편은 딸을 데리고 온 그 팀과 함께 큰 신생아 중환자 병동(NICU)이 있는 큰 병원으로 떠난 후에

혼자 남은 나는 태어나서 제일 힘든 시간을 내 고통보다는 엄마와 떨어져서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딸 생각에

누워있기조차 불안하고 미안했더 기억이 난다.

 

당시 필라델피아에 있는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남편은 두 병원에 나뉘어서 입원 해 있는 아내와 딸을 돌보느라

아예 휴학을 하다시피 하고 짐을 싸서 뉴져지 집으로 올라 와서 어렵고 끝도 없는 긴 간병이 시작되었고,

나 역시 내 몸을 추스리기도 전에 딸이 퇴원하기 까지 여름과 가을이 가는지도 모르고 중환자실에서 지냈다.

 

딸이 태어난지 6일 후에 퇴원한 나는 남편을 통해서 딸의 상태를 전해 듣다가

처음으로 딸이 입원해 있는 JCMC 중환자실을 방문을 해서 딸과 가슴떨리는 첫 상봉을 했다.

안 그래도 950 그람으로 낮은 체중이 수분이 잃어버린 탓에 900 그람 이하로 떨어지고

온 몸이 80대 노인처럼 주름투성이였고, 등에는 lugano라는 긴 털이 그대로 있는 상태였고,

손바닥만한 몸뚱아리에 온갖 튜브와 주사바늘이 꼽혀 있었고,

수시로 치수가 위험하다고 계속 계기들이 시끄러워서 더 불안감을 조성해 주었고,

혼자 숨을 못 쉬어서 호흡기도 달려 있고, 너무도 안스러워서 나마저도 숨을 제대로 못 쉬었다,

미국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작성하는 birth certificate에는

엄마의 검지 손가락과 아기의 발바닥을 잉크로 찍어서 남기는데

딸의 발바닥과 내 검지 손가락 끝부분과 사이즈가 거의 같을 정도로 너무도 작았다.

 

그 작은 몸으로 첫  1주일을 버티고 살아 있는 것이 기적같았다.

만지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아서 그저 눈물만 흘리고 하릴없이 아이를 바라만 보는 일 외에는

엄마로서 해 줄 것이 없어서 더 미안하고 불쌍했다.

 

NICU 병동에는 미숙아를 돌보는 스페샬 의사진들과 3 shifts 제로 수고하시는 간호사들은 너무 일이 많아서 한 간호사가

겨우 두명의 환자를 돌 봐야 할 정도로 응급상황이 수시로 일어 났고,

 그렇게 엄청 아프고 위험하다는  spinal tap도 두번 하면서

7월 한달  내내 하루에도 몇번씩 상태가 악화되어서 응급처치를 할 때마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느라 십년감수를 계속되는 시간을 보냈다.

담당의사도 아이의 생존율을 처음에는 5%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너무도 발생할 위험이 언제라고 발생할 수 있기에 아예 그런 통계학적 확률자체가 무의미하다고도 했다.

아이의 상태는 이렇게 8월초까지 시시각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서너번씩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간신히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호전되어 갔다.

 

 

태어난지 20일 만에 딸의 상태가 좋을 때에 호흡기를 잠시 빼고, 처음으로 품에 꼭 안아 본 딸...

이렇게 초미숙아들로 태어난 아이들이 엄마나 아빠의 따뜻한 touch가 생존력을 높여준다고 여건이 허락하는대로 안아 주었다.

 

너무도 작은 아이를 안고 있는 아빠의 손이 상대적으로 아주 커 보인다.

아이의 상태가 좋았다가 악화되었다를 반복하다 보니  3주 후인데 아직도 몸무게는 930 그람을 못 벗어나고 있다.

 

 

생후 4주, 940g  오늘 처음으로 warmer에서 incubator로 옮겨졌다.

아주 위독하고 초 미숙아들은  warmer라고 하는 작은 유리 상자에 두는데,

이는 위독시 의사와 간호사들이 한꺼번에 처지를 할 수 있게 벽과 뚜겅이 없고 오픈된 상태의 침대이다.

이런 인큐베이트에 들어 왔다는 자체가 아주 위험한 고비를 잘 넘겼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감히 희망을 가져 보기도 했다.

그러고도 상태가 나빠져서 다시 warmer로 두번이나 쫓겨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절대로 방심은 여전히 금물인가 보다.

 

생후 8주 드디어 1000 그람을 돌파했다.

미숙아들을 위한 손바닥보다 작은 기저귀가 왜 저리도 큰지...

 

 

생후 10주 1500 그람,  아직도 젓을 혼자서 빨 힘이 없어서 튜브로 엄마 젖을 먹기 시작했다.

처음 젖의 양은 고작 1 cc 의 모유를 두시간마다 먹는다.  그나마 몸 상태가 좋지않으면 그 양을 소화를 못했다.

 

9월 27일... 일기를 보니 1800 그람이란다.

아직도 정상으로 태어난 신생아의 반도 안되는 몸무게지만

정확이 태어나서 두배로 늘어난 딸아이가 드디어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를 쳐다 보는 듯 했다.

엄마와 아기가 모두 오랜만에 함께 웃는 모습이 지금 봐도 참 보기가 좋다.

 

우리는 이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처음으로 Intensive Care 병동에서 Intermediate Care 병동으로 옮겨진 날이다.

이제는 2시간마다 모유의 양이 늘어서 약 10cc를 소화 할 수 있어서인지 볼에 살이 붙었다.

이 병동에서는 말 그대로 의사와 간호사들의 보호안에서 적어됴 2kg의 체중을 늘이는 곳이다.

 

 

10월 16일, 2100 g

처음으로 온갖 튜브와 주사기를 다 뗀 날이다.

체중도 늘어서 이틀 후에 퇴원해서 처음으로 집으로 갔다.

 

 

그리고.....

1987년 10월 31 할로윈 데이..

NICU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사무직원들이 이렇게 다 차려입고 이 병동을 거쳐 간 아가들의

reunion 파티를 열어 준다.  (딸을 안고 있는 분은 담당 주치의사 )퇴원한지 2주만에 그 병동에 다시 가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벌의상을 입은 분이 중환자 병동의 수간호사이시다.

매일 하루 종일 시간을 같이 보내서 마치 가족같이 가까워졌다.

과거에 이 병동을 거쳐 간 아이들의 모임에 가 보니

퇴원해서 정상으로 생활하는 아이들보다는 여전히 튜브에, 산소통에, 휠체어에 타고 온 아이들이 더 많아서

맘이 참 짠하기도 하고, 아무런 큰 장애없이 퇴원한 딸의 병상기는 정말 기적에 가까웠다는 생각에

절대자이신 분에게 절로 입에서 감사의 기도를 달고 살기도 했다.

 

 

퇴원하고 처음으로 외식을 하고 국화가 만발한 집 앞에서...

 

 

생후 4개월 후...

여전히 신생아보다는 작은 2.5kg 이지만

태어날 때 보다 거의 3배의 몸무게로 우리 눈에는 우람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세상을 일찍 나와서 평생 아플 것을 한꺼번에 다 겪은 탓인지

천만다행으로 딸아이는 잔병치례도 없이 너무도 건강하게 착하게 잘 자라 준 아이에게

딸아이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을 때마다  살려만 준다면 이렇게 저렇게 살겠다고 많이도 약속한 것들을 대부분 망각하고

쓸데없는 엄마의 욕심을 앞세우고딸 아이를 때로는 닥달을 한 내 자신이 참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그때 일을 오랜 세월 뒤에 다시 회상해 보니

아침에 잿빛 하늘ㅇ 잔뜩 찌푸린 날씨에

눈보라는 휘몰아치고 하루 사이에 뚝 떨어진 기온으로 아침에 영하 22도의 추운 날씨 탓부터 시작해서

하루 종일 10 cm 정도 쌓인 눈을 어떻게 치울까 등등

가슴에 쌓였던 여러가지 불평 불만들이 갑자기 가소로와졌다.

이렇게 건강한 몸과 정신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옆에 있고,

이렇게 추운 겨울에도 따뜻하게 보호 해 줄 집이 있고,

먹고 싶은 음식도,

입을 옷도 갖추고 사는 나야말로

복터진 여인네였음을 새삼 실감했다.

 

끝으로 제1회 세계 조산아의 날을 맞아서

너무도 짧은 생애를 마감한 많은 아가들의 영혼을 위해서

두손 모아 기도를 바쳐 본다.

 

 

 

 

 

music: Ave Maria from helen's cd b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