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Welcome to Wildrose Country
  • Welcome to Wildrose Country
About me...Helen/헬렌의 정원에서

열무씨를 까면서...

by Helen of Troy 2015. 11. 18.

 

올해 여름은 예년보다 더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서, 텃밭 간수가 많이 소홀해서,

일찌감치 내년 봄을 기약하면서, 9월 중순에 텃밭을 깨끗이 정리했다.

텃밭 정리를 하면서, 아직도 먹을 수 있는 상치나, 깻잎, 아욱, 풋배추등은  뿌리채 뽑고,

이미 꽃이 피고 져서 씨가 달린 열무나 쑥갓, 호박은 아직 충분히 영글지 않았지만,

내년 봄에 다시 심기 위해서 따로 커다란 박스에 넣어두고,

가을볕에 잘 마르도록 베란다에 널어 놓았다.

 

매년 11월이면 열무 씨를 까고...

 

그리고는 정원 일도 줄어 들면서, 베란다에 내어 놓았던 채소 씨를 한동안 잊고 있다가

11월 초 아침 어느날 서리가 내려서 허옇게 덮인 정원을 2층에서 내려 보다가

펴 두었던 씨가 머리에 떠 올라서, 얼른 내려가서 아래층 베란다에

2달동안 잘 말린 씨들을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5월 중순이면 열무 순이 나오고...

 

그리고 부억 옆 창가에 두고는 바쁜 일상에 쫓기다 보니, 1주일이 그냥 흘러 갔고,

어제 월요일 아침에 마침 시간이 한가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열무씨를 까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선, 컴퓨터에 평소에 잘 챙겨 보지 않지만, 시간 때우기에 그만인 한국 드라마를 켜 두고,

티팟에 뜨거운 물을 그득 부어서 차도 넉넉히 준비 해 두고,

말라서 껍질이 단단한해진 열무 seedpod 을 손끝으로 하나씩 까기 시작했다.

 

 

5월과 6월엔 여리고 파릇한 열무순 비빔밥을 해 먹고...

 

 

이렇게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씨까기를 긴 시간동안 반복하면서

마치 묵주기도를 반복해서 하는 것처럼 마음 비우는 시간을 덕분에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우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하찮은 식물이라도,

봄부터 긴 시간동안 작디 작은 단 한톨의 씨를 맺기 위해서, 비 바람을 견디고 이겨내고

주어진 본분을 다 하고는 미련없이 땅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의연함과 희생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더불어 세상에는 아무 수고없이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실감이 갔다.

 

6월이면 열무가 풍성하게 자라고...

여름 내내 열무김치 덕분에 열무김치 냉면과 보리 비빔밥을 편하게 먹기도 하고..

 

시장에서 물건을 고를때처럼 씨를 깔 때도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기에는 씨 주머니가 길고 튼실해서 그 속에 알알이 씨가 박혀 있을 것 같은

모양새가 좋은 씨 주머니부터 까기 시작하기 마련인데,

올해는 영글기도 전에 너무 일찍 따서 그런지는 몰라도 멀쩡하게 생긴 주머니 속에는

예상과 달리 의외로 검고 다 말라 비틀어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쭉쟁이만 그득해서

봄과 여름에 들인 수고는 물론, 딱딱한 껍질을 어렵게 까는 공을 들인데에 비해서 허망하고 배신감이 앞섰다.

하지만 보기에 신통치 않게 보여서 잘 생긴 주머니보다 차례가 뒤로 밀리는  씨 주머니들 속에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빽빽하고 촘촘하게 씨가 알알이 박혀 있는 씨들이 그 섭섭했던 마음이 서서히 채워짐이 느껴졌다.

 

8월이면 연보라 열무꽃이 피어나고...

 

 

그리고 나도 지금까지 살면서, 소소한 것부터 사람들까지

그 사람의 겉 모습과 알려진 스펙만으로 좁아터진 편견을 가지고 섣부른 판단을 하면서

살아 온 내 자신이 떠 올려지면서 자그만한 씨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고,

나 역시 겉보다는 속이 꽉 찬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다짐이 저절로 자신에게 하게 되었다.

 

9월이면 꽃이 떨어진 자리에서 씨 주머니가 삐죽하게 나오고...

 

 

하나씩 씨 주머니를 깐 다음에 빈 껍데기와 허당 씨주머니는 한쪽에 쌓아두고,

알맹이 씨들은 작은 그릇에 옮겨 담는 일이 예상했던 2시간보다 훨씬 길어져서

두편만 보려던 드라마도 세편, 네편까지 보게 되는 상황에 놓였지만,

점점 수북히 쌓여가는  쭉쟁이 더미와  까도 까도 늘어나지 않은 씨를 담은 그릇을 보면서,

 돌아가는 드라마는 무성영화처럼 드라마의 대사는 점점 내 귀에 들어 오지 않고,

내 자신이 캐톨릭 신자라서 그런지 최후의 심판에 관한 성경구절이 머리에 맴돌기 시작했다.

 

 

올해는 예년보다 3주 일찍 9월 중순에 씨를 따서 말려 두었다가...

 

 

우리가 살다가 이승을 하직하고 저 세상에 가서,

한명씩 전지전능한 조물주 앞에서 엎디어서 엄중한 심판을 받을 때에

나처럼 열무 씨주머니를 하나 하나씩 까 보는 것처럼

리의  삶 역시  주어진 본분에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서

과연 이승에서 살면서 얼마나 풍성한 열매를 잘 맺었는지 속속들이 숨길 여지도 없이 확인을 하고

그 심판에서 합격한 이들은 잘 영글은 씨처럼 반갑게 천국행 열차 애열에  들게 하고,

똑같은 조건과 시간, 그리고 보살핌을 받았는데도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없는 텅 빈 씨 주머니같은 이들은 가차없이 쓰레기더미처럼

지옥행으로 가차없이 내동이쳐 버려질 것 같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손끝이 너덜할 정도로 4시간을 투자해서 씨를 까고...

 

 

그런 생각이 들자, 습관이나 타성, 그리고 나태함에 젖어서 안이하게 살아 왔던

지난 시간이 떠 올려지면서 정신이 버쩍 들었다. 

아무리 100세 시대를 산다고 해도, 내가 올해 평소보다 3-4주 빨리 거두어 들였듯이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할지는 그 아무도 모르기에,  늘 그 때를 조금이라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오늘부터라도 쭉쟁이 삶에서 잘 익은 열매처럼 실속있고, 누군가에게 보탬이 될 수 있는 자세로 살아겠다고

자신에게 다짐을 하면서, 4시간 만에 씨 까는 일을 마쳤다.

 

요렇게 토실토실하고 귀중한 열무씨를 얻는다.

 

 

 

이런 마음 가짐이

적어도 얼마 남지 않은

올 한해 11월과 12월까지 지속되어서

한 해를 잘 마무리하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