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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Log/포르투갈

[포르투칼 여행34]나자레 2편-기념 채플(Chapel of Memory)/바스코 다 가마 기념비(Padrão de Vasco da Gama)

by Helen of Troy 2018. 1. 26.



나자레의 높은 절벽 위에 위치 해 있는 자그마한 기념 채플(Chapel of Memory)과

오른편에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 (Memorial of Vasco da Gama)기념탑


 

 


나자레의 높은 산 위에 위치한 넓은 광장 


 

 


기념 성당 왼편에는 식당과 기념품 가게들이 들어 서 있다.

 

 

 


 1182년에 생명을 건진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진

기념 채플( Capela da Memória/Chapel of the Memory)

지붕이 아주 특이하게 아름다운 아줄레이쥬 블루타일로 덮힌 것이 아주 인상적이다.



 




나자레의 전설은 1182년 9월 14일 이른 아침에 시작되는데

포르투 데 모스의 시장이었던 푸아스 로우피뇨(Dom Fuas Roupinho)가

그가 지배하던 지역의 숲에서 사냥을 하던 중에

사슴 한마리를 포착하고 그 사슴을 쫓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쪽에서 짙은 안개가 몰려 와서

절벽 위로 도망치던 사슴을 쫓던 로우피뇨씨는 자욱한 안개 속에 갇히면서

사냥팀원들로부터 혼자 떨어지게 되고 방향감각을 잃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그가 절벽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 챘고,

그 곳은 수백년간 이 지역에서 존경을 받아 온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 상이 있는

자그마한 동굴 옆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는 바로 큰 소리로 성모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자,

갑자기 그의 말이 절벽 바로 직전에 위치한

'기적의 돌출부(Point of the Miracle) 앞에서 멈추어 서면서,

로우피뇨씨가 100 미터 이상의 절벽위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아서

그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생명의 기적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올렸고,  그 동굴 위에 작은 채플을 세워서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의 이미지가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도

그가 받은 것처럼 기적과 은총을 경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석공들을 데리고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성모님의 이미지가 있던 동굴을 막기 전에,

석공들이 당시에 현존하던 제대를 부수었는데,

깨진 돌조각 중에서 신성한 유골과 유품과 오래된 양피지가 담긴

상아로 만들어진 괘를 발견했다.

그 양피지는 성모님이 그녀의 왼쪽 다리에 앉은 아기예수님에게

젖을 먹이는 조각상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 성모상은 크리스찬 초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나자렛에서부터 경배해 왔다고 쓰여 있었고,

5세기에 차리아코 수사가 성상파괴자들로부터 구해 내어서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위치한 카울리니아나 수도원에 안치해 두었다.


하지만 711년에 북 아프리카에서 건너 온 무어족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범해서, 로데릭왕이 이끄는 크리스찬 군대가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서

과달레테에서 전투를 벌렸지만, 결국 무어족들에게 패하게 되었다.


이 패전 소식이 메리다에 전해지자, 카울리니아나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밀려드는 무어족 군대를 피해서 안전한 곳으로 피난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과달레테 전투에 참전했던 로데릭 왕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아서

거지로 분장해서 이 안전한 수도원에서 잠시 머물게 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로마노 수사님에게 고백성사를 부탁하면서, 그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자, 수사는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는 오래되고 신성한

성모님과 아기예수님의 이미지를 들고 안전한 곳으로 함께 피신하자고 제의했다.


팔레스타인의 신성한 곳에서 처음부터 나자렛의 성모님이라고 존중을 받아 오던

이 성모상은 로마노 수사와 로데릭 왕에 의해서 지금의 포르투칼의

대서양 해변에 위치한 동네로 들여 왔다.

나자레에 도착한 그들은 성 바로톨로메우 산 위에 있던

허름하고 빈 오두막에 며칠 머물다가 따로 은둔 수도자의 생활을 하기로 하고,

로데릭 왕은 그 오두막에서, 로마노 수사는 성모님 상을 지참하고

바다 위 근처에 절벽 끝에 있는 작은 동굴에서 기거하기 시작했다.


일년 후, 로데릭왕은 이 지역을 떠나게 되고,

로마노 수사는 이 절벽 위 동굴에서 죽을때까지 기거했다.

그리고 신성한 검은 성모님(black Madonna)는 그가 만든 제대 위에 모셔 두었다.


그러다가 1182년에 기적적으로 이 근처에서 목숨을 건진 로우피뇨씨가

동굴 위에 그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채플을 짓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이 채플은 기념 채플( Capela da Memória/Chapel of the Memory)로 불리우고 있다.




 


 

 

나지막한 입구 위에 놓여진 타일 장식 소품

한 가운데에 커다란 조개껍질 안에 성모님을 상징하는 왕관으로 꾸며졌다.

 

 


높이가 낮은 입구를 머리 숙여서 작은 채플 안에 들어서니

처음엔 어두워서 내부가 잘 보이지 않다가,

곧 아름다운 타일로 꾸며진 소박한 제대가 눈에 들어 왔다.

 



 이 소성당에도, 포르투칼의 유명한 azulejo(아줄레이주)타일들로

제대뿐 아니라, 천장과 벽이 꾸며져 있다.

마모된 바닥의 돌은 지난 1,000년간 수많은 순례자들이

다녀 간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아줄레이주는 원래 북 아프리카에 거주하던 아랍인들이 고대 로마시대에 유행했던

모자이크 방식의 건축을 따라하기 위해서 개발한 타일로

무어인들이 지중해를 건너서, 이베리아 반도를 700년간 지배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칼인들에게 전수되었다.

 

  




아줄레이쥬 라는 단어는 아랍어로 '문질러서 광택이 나는 돌' 이라는 뜻을 지닌

 '아즈-줄라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고,

초반에 제작된 아줄레이쥬 타일들은 무어인들의 영향이 많이 엿보였지만,

점점 그들만의 스타일로 점차 변경되었다.

 

  

 

 

 

 

 



유구한 역사와 종교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이 채플답게

 한쪽 천장에 파손된 아줄레이쥬 타일이 빠른 시일내에 보수되면 좋겠다.


 

 


 채플 아래에 로마노 수사와 로데릭 왕이

검은 성모님 상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처음 기거하던 은신처로 내려 가면서...


   

 


 


  

 


초막 은신처로 내려가는 통로에 놓인 작은 창을 통해서

아래 아름다운 나자레 해변이 내려다 보인다.


 

  

 

대부분의 성모상과 달리 이 성모상은

성모님이 아기를 왼쪽 무릎에 앉히고, 젖을 먹이는 모습을 한 동상이다.

 

 



오리지날 검은 마도나는 광장 반대편에 있는

나자레 성모님 성당 제대 위에 안치되어 있다.


 

 


말을 탄 로우피뇨 시장의 모습을 띈 타일도...

 

 



 

 

 


  


 나자레의 높은 절벽 위인 씨티우(Sítio)에 위치한

이 기념 채플 옆에, 포르투칼이 자랑하는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기념비가 1939년에 세워졌다.





전설에 따르면,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떠나기 전에 이 채플에 와서

성모님께 경배를 드리고, 안전한 항해를 간구했다.

그리고 성모님 목에 커다란 금목걸이를 걸어 두고,

대신에 성모님 목에 걸려 있었던 구슬 목걸이를 가지로 인도로 향했다.



 


Padrão de Vasco da Gama

  

 다 가마가 타고 가는 배가  폭풍의 곶(Cape of Storms) 지날 때에

강한 태풍과 만나게 되자, 가지고 온 그 구슬목걸이를 바다에 던지자,

바로 바다가 잔잔해져서 배와 선원들의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무사히 인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절벽 위 왼편에 바스코 다 마의 기념비가 서 있다.


인도에서 무사히 돌아 온 다 가마는

다시 나자레의 씨티후에 순례를 와서, 

그와 선원들의 목숨을 구해 준 성모님께 감사를 드리고,

귀한 망토를 성모님께 헌정했다.


  


 

 관광 버스 두대가 들이닥치자, 갑자기 소란해진 광장 한쪽에 서 있는 다 가마 기념비

 


 

 바스코 다 가마(1460-1524)는 포르투칼이 자랑하는 탐험가로

세계 처음으로 유럽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한 인물이다.


당시 유럽은 인도에서 들여 온 향신료들이 엄청 인기가 있었는데,

그 향신료를 들여 오는 유일한 길은 육로인 실크로드 뿐이었다.

하지만 이 육로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경비도 많이 들고 위험했다.

포르투칼의 왕은 시간도 적게 들고 경비도 적은 항로를 개척하면

유럽에 향신료를 공급해서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488년에 이미 포르투칼 귀족출신 탐험가 바르토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 남쪽 끝(희망봉)을 돌아서, 유럽인으로서

대서양 바다에서 처음으로 인도양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한 바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도양과 대서양 바다가 연결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바스코 다 가마는 포르투칼 왕으로부터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서 인도로 가는 무역 항로뿐 아니라

항해하면서 무역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발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497년 7월 8일에 그는 4척의 배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베리오,

그리고 창고로 쓰여진 무명의 배)와 170명의 선원을 이끌고 인도로 떠났다.

그가 이끄는 배들은 11월 22일에 희망봉을 돌고 나서

다시 북쪽으로 항해를 하면서, 몸바싸와 말린디 항구에 내려서

무역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운 좋게도 말린디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아는 동네 항해자와 통역사를 섭외해서, 함께 대동했다.

그리고 먼순(장마) 시즌의 부는 바람 덕분에

예상보다 빠르게 한달도 채 안 되어서 

인도 남동부 해안 도시인 칼리컷에 무사히 도착했다.


칼러컷에 도착한 바스코는 그들과 무역할만한 상품들을 싣고 가지 않아서,

칼리컷의 상인들이 바스코를 의심하기 시작하자, 그 지역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항해는 갈 때보다 두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고,

선원들의 반이 비타민 부족으로 생기는 괴혈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는 인도와 무역항로를 개척한

 영웅대접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바스코의 두번째 인도로 무역/탐험 항해를 떠날 때는

처음과 달리 무장을 한 20척의 배가 교역할 물자를 갖추고 떠났다.


세번째 항해를 떠날 때는 포르투칼 인도의 총독 자격으로 떠났지만,

인도에 도착한지 얼마 후에 말라리아에 걸려서 사망했고,

6남 1녀를 두었는데, 두번째 아들이 포르투칼 인도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참고:  달 표면에 있는 화산 분화구의 이름을

탐험가의 이름을 따서 바스코 다 가마로 명명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인도의 서부 지방과 동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많은 인도인들이 포르투칼 성을 지니고 있다.





 

  


 


바스코 다 가마 기념비가 있는 곳에서 내려다 본 대서양 바다

 

 



기념비와 기념 채플이 있는 씨티우 끄트머리에서...

 

이 면 원피스는 2015년 그리스 밀로스 섬에서

노점상에서 디자인이 특이하고 화사해서 샀는데,

다음해, 2016년 7월 포르투칼 해안 지방 여행때 즐겨 입었는데

예쁘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은 옷이다.

 

 



 


이 자그마한 채플에 전 유럽에서 몰려 드는 순례객들이 점점 많아지자,

1377년에 페르난두 왕명으로 건축된 

나자레 성모님의 성당으로 발 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