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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Log/네덜란드

[네덜란드 여행41]델프트의 역사를 함께 한 구교회 3편/레벤후크, 트롬프 제독의 무덤, 파이프 오르갠 & 스테인드 글라스/Oude Kerk in Delft

by Helen of Troy 2021. 3. 26.

 

구교회의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2019년 6월 13일)

 

델프트 구교회의 내부 모습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스테인드 글라스 바로 아래에 위치한 엘리자베트의 기념 무덤

엘리자베스 모건의 무덤

Elisabeth Morgan's mausoleum (1585-1608)

 

 

무덤의 주인은 엘리자베트 마르닉스 밴 성 알데곤데/Elisabeth Marnix van St. Aldegonde로

남편은 영국 출신 찰스 모건 경이며,그녀의 아버지는 빌렘 왕의 절친한 친구이자,

네덜란드 국가 가사를 쓴 필립스 마르닉스 밴 세인트 알데곤데이다.

그녀는 1608년에 23살 젊은 나이에 딸 안나를 낳은 지 1주일 후에

슬퍼하는 남편과 어린 딸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무덤은 승리를 자축하는 아치 형식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사후에 더 나은 삶을 누리기를 희망을 상징한다.

무덤에 포함된 모든 문장(coat of arms)들은 그녀의 외조부모님을 비롯해서

명문 귀족 외가 쪽 가문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자베트는 찰스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 찰스의 마음이 그녀의 기념 무덤에 그대로 담겨있다.

 

이 기념 무덤은 그녀가 작고한 지 3년 만에 완성되었으며,

그녀의 삶, 장점, 그리고 찰스의 사랑의 마음을 담은 내용을

금박으로 된 글자로 새겨서, 비록 그녀가 이 세상에 없지만,

절대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찰스의 염원에서 제작되었다.

그녀의 무덤은 검은 대리석을 소재로, 그녀의 동상은 하얀 대리석으로 제작되었으며,

그녀가 사망한 직후에 그녀의 얼굴 마스크를 떠서 만들어졌다.

 

그녀가 사망한 후, 찰스는 베르겐 옵 좀/Bergen op Zoom의 총독으로 부임했으나,

끝까지 독신으로 살았다.

 

 

 

 

 

금박으로 돌에 새겨진 내용은:

 

This stone guards Elisabeth, dauther of Marnix, wife of Morgan.

I stem from an illustrious lilneage with a long line of ancestors.

May my name may never be forgotten, in the whole world,

Even though time might erase the memory,

It is honour enough to have loved one husband,

Such a precious love, means everything to me.

 

이 돌은 마르닉스의 딸이자, 모건의 아내 엘리자베트를 지켜준다.

나는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의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비록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이 사라질지라도

내 이름은 이 세상에서 절대 잊혀지지 않기를 기원한다.

한 사람의 남편을 사랑할 수 있은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나의 전부다.

 

 

 

 

교회 바닥에 있는 엘리자베트의 묘비

 

또 다른 내용을 발췌하면:

 

DOM Elisabeth van Marnix, daughter of Filips Marnix van St. Aldegonde,

a generous woman, his good, chaste wife, a loving mother, 

did Charles Morgan, knight, military commander (this stone) erect.

I lived as you still live and I died on 10 February 1608.

I leave a daughter behind, Anna Morgan.

The law that governs us all, dictates 

that we are to be born and to die.

 

 

 

 

엘리자베트의 딸 안나의 무덤

 

안나는 그녀가 죽으면 델프트의 구교회에 묻힌 어머니 옆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녀는 어머니와 달리, 두 명의 남편을 사별할 때까지 장수해서

1687년에 오렌지가의 빌렘이 영국의 왕으로 등극한 지 1년 후에 사망해서 이 곳에 묻혔다.

 

 

 

 

1632년에 작고한 아가타의 무덤

 

 

 

 

 

1511년과 1611년에 작고한 게루스트 가문의 무덤

 

 

 

 

 

델프트 시장을 역임하고 1665년에 작고한 헤라르드 벨하우크의 묘비문

Epitaph for Gerrard Welhouc

 

 

 

 

 

델프트의 명사들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묻힌 델프트 구교회 바닥

 

 

 

 

 

마르튼 트롬프(1598-1653) 기념 무덤/Maarten Tromp

 

트롬프의 기념 무덤은 다른 국가적으로 유명한 위인들의 기념 무덤의 표상이 되었다.

이렇게 제작된 기념 무덤들은 델프트의 신교회와 구교회에 설치한 후 

일반인들에게 공개해서, 시민들이 추모를 할 수 있게 배려했다.

 

 

 

 

네덜란드의 해군의 "대부"이자 존경받는 제독이었던 트롬프

 

 

 

 

트롬프가 사용하던 해양기기

 

 

 

 

테르 하이더 전투, 혹은 쉐베니건 전투

The Battle of Ter Heide or The Battle of Scheveningen

 by 얀 아브람스 베르스트라튼/Jan Abrahamsz Beerstraaten, 1653

1653년 7월 31일

 

 

 

 

 

쉐베니건 전투/테르 하이더 전투는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벌어진

첫 번째 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1653년 7월 31일(그레고리언 달력으로는 8월 10일)

북해의 쉐베니건 항구에서 가까운 바다에서 벌어진 해상 전투였다.

 

이 작품의 중앙에 보이는 네덜란드 해군의 "Fortune/해운" 군함이

영국의 "Andrew 군함을 침몰시키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이 전투에서 네덜란드 해군은 10척의 배가 침몰되었고, 

영국은 한 척만 침몰되어서, 네덜란드 해군이 더 큰 피해를 입었지만,

하지만 영국 해군의 나머지 배들은 너무 크게 파손되어서

네덜란드 항구를 봉쇄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영국 해군은 작전상으로 승리를 거두고,

네덜란드 해군은 실제적으로 더 큰 피해를 입었지만, 

단기적으로 전략적으로 승리를 거두어서, 얼마 후 네덜란드 해안을

영국 해군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쉐베니건 전투를 이끈 트롬프 제독의 무덤

 

 

 

 

 

안토니 반 레벤후크의 무덤/Antoni van Leeuwenhoek(1632-1723)

 

레벤후크의 무덤

 

'미생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안토니 반 레이븐후크는

델프트에서 태어나서 젊었을 때에 포목상에서 일을 하다가

1653년에 자신이 경영하는 포목점을 열어서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으로 자리 잡았다.

그 덕분에 도시 정치에도 관여하게 되었고, 점점 자유로운 시간이 많아지자,

렌즈 제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독학으로 직접 렌즈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레벤후크 묘비문

 

그렇게 제작한 렌즈를 사용한 현미경으로 1670년대에 그는 세계 최초로

미생물의 존재와 생태 그리고 크기를 파악하게 되었고,

이들을 작은 동물이라는 뜻을 지닌 animalcules이라고 최초로 명명하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근육세포, 박테리아, 정자, 적혈구와 미세혈관 내의 혈액순환을

그가 직접 제작한 현미경을 통해서 최초로 관찰한 인물이기도 했다.

 

 

 

 

 

델프트 구교회의 파이프 오르갠

 

오르갠은 오래전부터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종교개혁 전부터, 이미 오르갠은 미사에 빼놓을 수 없는 악기였으며,

개혁 전에 교회에 설치된 모든 성상과 조각품들이나 제대 용품들을 파괴되었지만,

오르갠은 유일하게 보존될 정도로 신자들에게 큰 존재였다.

 

종교개혁 후에 오르갠에 대한 견해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독일의 마틴 루터는 오르갠을 교회에 전처럼 보존하고 싶은 반면에,

사람의 목소리만이 신을 찬미할 수 있다고 철저히 믿었던 영국의 존 캘빈은 

교회 내에서 예배 중에 오르갠 사용을 극구 반대했다.

 

당시 델프트 교회에서는 예배 중에 교회 내에서 오르갠이 연주되지 않았지만,

예배 후나, 축일 그리고 시장이 서는 날에는 오르갠 음악이 연주되었다.

그러다가 1634년에 예배 중에 오르갠 연주가 허용되었는데, 

가장 큰 현실적인 이유는, 오르갠 연주 없이 신자들이 부르는 성가는

너무도 음정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 후에는 교회 바깥에도 설치되어서, 

예배 중에 부른 성가들은 물론이고, 예배가 없을 때에도

오르개니스트는 교회음악이 아닌 대중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1454년에 구교회의 사목위원회는 이 교회에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갠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델프트의 부유한 맥주 양조장 사장과 반 데르 호흐/van der Hoog 시장이 기부한 자금으로

오르갠이 제작되어서 설치되었다. 하지만, 15세기에 제작된 이 오르갠은

새로 제작된 오르갠의 설치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참고로, 호흐 시장의 무덤도 이 교회에 있다.

 

 

델프트 구교회의 파이프 오르갠

 

이 오르갠은 바츠-비터 오르갠/The Batz-Witte organ으로

19세기에 크리스찬 비테에게 의뢰해서 제작된 오르갠이다.

 

 

Three virtues

오르갠 제일 꼭대기에는 세 가지 미덕을 상징하는 세 여인상이 있다.

왼쪽에는 책 한 권, 모세의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과 횃불로 표현된

믿음/Faith의 미덕의 여인상이 있다.

가운데는 어린이들을 상징으로 한 사랑의 미덕,

그리고 오른편에는 희망의 미덕이 닻으로 표현되었다.

 

 

 

 

 

캐비넷 오르갠

 

델프트의 구교회는 캐비넷 오르갠을 포함해서 세 대의 오르갠이 설치되었다.

교회 문이 닫혔을 때 캐비넷 오르갠은 겉으로 봐서는 평범한 캐비넷으로 보이는데

이 오르갠은 델프트 대학교 학생회가 18세기에 이 교회에 기증을 해서

때로는 '학생 오르갠'으로도 불린다.

 

 

 

 

소형 오르갠

 

규모가 작고 붉고 핑크빛을 띤 이 소형 오르갠은

구교회의 북쪽 수랑/transept에 위치해 있다. 

이 오르갠 역시 비터가  델프트의 아르멘케르크 교회를 위해서 제작되었다가,

1962년에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서, 구교회로 옮겨졌다.

 

 

 

 

 

트리니타스 종/Trinitas bell

 

이 종 세트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종으로

무게는 9,000 킬로그램, 지름은 2.3 미터에 달한다.

이 종은 헨드릭 반 트리어에 의해서 1570년에 제작해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예전에는 이 종을 울리려면, 32명의 남성들이 필요했는데,

1932년부터는 전력을 사용해서 종을 울리고 있다.

이 종은 왕족이 강제로 억류되었을 때처럼 

커다란 재난이 터졌을 때에만 정식으로 크게 울리지만,

매일 정시를 알려주어서, 짧게나마 종소리를 지금도 들을 수 있다.

 

 

 

 

 

구교회의 건축 역사

 

1050년과 1240년의 교회 모습

 

 

 

1324년 & 1396년

 

 

 

 

1430년과 1510년의 모습

 

 

 

 

1563년도의 교회 모습과

모든 증축공사와 리모델링 계획대로 완공을 했을 경우의 교회 모습

 

 

 

 

 

 

 

 

 

구교회의 천장

 

 

 

 

 

 

 

 

 

 

 

 

 

 

 

교회를 나와서 교회 바로 옆에 흐르는 운하를 따라서

 

 

 

 

세 개의 다리를 건너서 저 앞에 보이는 델프트 기차역으로 걸어가서,

 

 

 

 

2시 20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20분 후에 도착한 로테르담 기차역에 도착했다.

 

 

 

 

로테르담 기차역을 나와서 로테르담 도시와 만났다.

 

 

 

계속해서 로테르담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