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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Log/ 터키

[터키 여행2]수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대 에페소 2편-극장/운동장 (Theatre Gymnasium in Ephesos)

by Helen of Troy 2017. 9. 22.



 터키 서해안에 위치한 에페소의 극장 운동장(Theatre Gymnasium)



 

오늘 우연히 주제별 카테고리에 2년 전에 3주를 방문했던

터키의 여행 이야기가 달랑 하나만 올라 온 것을 보고

2년만에 두번째 이야기를 올려 봅니다.






전설에 의하면 에페소(Ephesus or Ephesos)는

여전사들의 부족인 아마존들에 의해서

생겼다고 전해지며, 에페소는 청동기 시대부터 인간들이 터를 잡고 살던 도시로

기원전 7,000 여전부터 존재하던 고대 도시이다.

초반에는 카리아인들과 렐레지아인들이 모여 살다가, 기원전 1200년부터 그리스의

이오니아인들이 대거 이주해서 오랫동안 그리스의 이오니아 도시로 알려져 왔다.



그리스(이오니아) 에페소-Greek Ephesus

이오니아인들이 모여 살다가 그리스 이오니아의 안드로클루스에 의해서

두번째로 에페소 도시를 설립하면서 에페소 연맹이 성장하다가

기원전 7,000년에 키메라인들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리디아의 왕들이 이 지역을 잘 다스린 덕분에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 중에

제일 부유한 도시로 거듭났다.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에페소는 교육의 중심지로 자리잡았고,

철학자 헤라클리투스도 에페소에서 활동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도 남자와 같은 권리를 누렸고,

여성 예술인들, 여류 조각가, 화가들의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리디아의 크로서스왕이 다스릴 시기에 '세계 7대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아르테미스 신전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신전은 기원전 35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페르시아의 사이러스왕이 리디아의 크로서스 왕을 물리치고,

현재의 터키인 아나톨리아 전지역을 장악했지만,

에페소는 여전히 활발한 무역의 중심도시로 호황을 누렸고,

기원전 5세기에 에페소 주위 지역의 이오니아 도시국가들은

침략자인 페르시아에 대대적으로 항거할 때도 에페소는 중립을 고수해서

강력한 페르시아 군대로부터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헬레니스틱 에페소-Hellenistic Ephesus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에페소는 기원전 334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밀어내고 다시 탈환하면서 해방을 찾았다.

알렉산더 대왕의 사망후에 이 지역을 다스린 라이시마쿠스 장군은

에페소의 개발과 성장에 힘썼고, 도시 이름을 그의 아내 아르시노 이름을 따서

'아르시네이아'로 명명했다.

라이시마쿠스 장군은 에페소의 새로운 항구와 원래 도시의 위치에서

남서쪽으로 3 km 떨어진 새로운 곳에 적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한

파나이르산과 뷸뷸산 허리에 성벽 공사를 주도해서,

기원전 281년에 이 새롭게  계획된 도시를 다시 예전 이름 에페소로

재탄생을 해서 지중해에서 가장 활발한 무역 항구도시로 자리매김을 했다.



로마시대의 에페소-Roman Ephesus

기원전 129년에 에페소는 페르가몬의 아탈로스왕의 유언에 따라

로마제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세금을 무리하게 추징하자

기원전 88년에 로마제국의 조세정책에 항거하는 폭동이 발생해서

로마제국의 군대에 의해서 주민들의 대학살을 당했다.

17년경에 발생한 지진으로 에세소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아시아에서 제일 중요한 무역도시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고,

셀서스 도서관이 보여주듯이 정치적으로나 지식인들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1세기부터, 에페소는 사도 바오로가 초대 크리스찬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자주 방문했고,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성 요한과 함께

이곳으로 이주해서 은퇴를 했다고 전해지는데,

신약성경에 나오는 에페소 서간은 성 바오로가 에페소의 크리스찬들에게

보낸 편지 덕분에 크리스찬들에겐 귀에 익은 이름이기도 하다.



에페소의 쇠퇴

기독교가 에페소의 주요 종교로 자리잡은 후에

에페소는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내리막 길이 시작되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에페소의 모든 신전과 학교를 닫게 명령했고,

여성들의 지위와 권리를 박탈해서 남성들을 지도하거나,

독자적으로 일을 하거나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했다.

아르테미스를 숭배하는 예식도 금지시키면서, 신전도 파괴되었고,

한때는 넓은 시가지 양편엔 조각상들로 아름답게 꾸며졌고,

밤에는 램프가 밝게 비추던 거리는 어둠에 쌓이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입구를 지나서 가로숫길을 건너자 멀리 극장겸 운동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Theater Gymnasium의 위치는 2번...

에페소 유적지 구경은 왼편에 있는 메인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이동하면서 감탄하면서 꼼꼼하게 챙겨 보았다.


 


가로숫길 바로 옆에서 제멋대로 흐트러진 돌들...




 극장 앞 넓은 공터에 예전의 이곳에 자리잡고 있던 건물들의

석재들이 즐비하게 누워있다.


 


 원형대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교하게 조각된 부서진 조각에서 비애감과 경이로임이 함께 밀려온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문양도 보이고...




석재를 깎다가 만 돌도 보이고...




수많은 기둥들의 초석들도 제 역할을 잊은채

가지런히 놓여져있다.

 



코린토 식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기둥 윗부분도 땅에 딩굴고...





 쇠퇴의 아름다움(Beauty in Decay)을 여실히 보여주는 석재들...


 


 이 극장겸 운동장은 기원후 125년에 지어졌고,

규모는 12,000 제곱미터에 달하며

U 자 모양으로 된 레크리에이션 과 로비 홀이 있고,

북쪽엔 다수의 목욕탕이 들어 서 있다.




이 넓은 길은 한때는 지중해의 가장 번성했던 항구로 이어지며,

거리의 양편에는 아름다운 조각상과 램프들이 줄지어 있었다.




The Arcadiane 는 길이 500 미터, 그리고 넓이는 11미터로

이 거대한 극장에서 항구로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넓은 도로이다.






에페소는 근처의 항구가 지중해의 주요한 무역중심지 덕분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항구가 위치한 항만은 원래 아탈로스 2세 제위 당시(159-138 BC)

인위적으로 막은 흔적이 있으며,

로마제국 지배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보수와 증축을 거치면서

세개의 거대한 문과, 다수의 창고들이 항만에 즐비했다고 한다.

3세기 후에는 인공 수로를 만들어서

에페소 도시와 항구 사이를 잇게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점점 강물을 타고 내려오는 퇴적물이

계속 쌓여가면서 이 수로마저 막히게 되면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치던 에페소 항구의 구실을 잃게 되었고,

따라서 에페소 도시도 함께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길은 아르카디우스 황제(395-408 AD) 제위 시기에 재건축되었고,

길 이름도 황제의 이름에서 따 왔다.




코린토식의 기둥 장식이 남은 기다란 기둥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운데 기다란 기둥은 사라졌지만, 아래의 초석부분과 위의 조각들이 

아직도 남아서 넓은 길가를 장식해 주고 있다.

 



 

 

 


 2000년 전에 이미 대리석으로 포장한 길을 노딜던

에페소의 시민들은 참 수준높은 삶을 살았음을 새삼 느껴진다.


 


 극장/스타디움의 계단에 올라서서 항구쪽으로 난 넓은 길을 내려다 보았다.

현대의 어느 도시의 한복판의 넓은 광장이어도 손색이 없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계단



 


에페소의 대극장


그리스위 북쪽 마케도니아 지역 출신 알렉산더 대왕

페르시아 인들과 군인들을 몰아내고 이 지역을 페르시아로부터 

도시를 해방시켰을 당시에 원래 극장은 극장을 건축하기에 지리적으로 아주 적합한

파나이르다그 언덕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극장의 서쪽의 증축공사는 로마제국에 지배하던 1세기에 거행되었고,

아울러 지속적인 보수공사를 거쳐서 2세기 무렵엔  25,000 의 관객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극장이 완공되었는데,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거대한 극장이었다.

거대한 장소에서는 인기높은 음악회, 연극 공연과 예술제 그리고 체육대회도 개최되었고,

당시에 인기있던 글라디에이터의 전투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이 극장은 공연의 무대로 사용될 뿐 아니라, 에페소의 주요 행사나 주민들의 모임이 열릴때에

사용되기도 했으며 집회라는 그리스 단어 ekklesia 의 장소였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사도 바오로 서간에 사도 바오로의 전교활동에 반대하는

은대장장이들의 반대시위도 이곳에서 일어났다는 귀절이 등장하기도 하고,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는 이들의 모임과 퍼레이드도 이 극장에서 거행되었다.


하지만 3세기에 이 지역에 발생한 거대한 지진으로 극장에 막대한 파손을 초래했지만,

극장으로서의 역할은 지속되다가, 비잔틴 시대에 들어서서는 수백년간 누렸던

최고의 명성을 서서히 잃게 되었고, 막바지에는 극장에서 성으로 전환되어서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갔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이 극장의 발굴작업은 대영제국 박물관의 의뢰를 받은

건축가 T. J. Wood 씨가1866년에서 1868년 사이에 발굴 기초 초사를 거친 후,

오스트리아 고고학 기관(ÖAI) 이 1898년에서 1890년 사이에 

헤버다이(Heberdey)씨의 진두지휘로 발굴작업이 거행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과학적인 조사가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의 

정보,기술과 기금으로 새롭게 시작되어서, 현재까지도 여전히 보수와 발굴

그리고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기원전 2세기 알렉산더 대왕 통치 당시의 에페소 극장 무대 크기는

길이 41.65 미터, 그리고 넓이 10.77 미터로 소 아시아에서 가장 큰 무대(skene)였다.

1 세기와 2세기 사이에 거행된 증축 공사와 리모델링 덕분에 

skene-orchestra 복합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무대로 리모델링 되었고,

반원 모양의 무대에서 30미터 위에 3단으로 된 관객석(Cavea) 이 설치되었고,

최고 직경은 150 미터에 달했다.


극장의 서쪽은 각각 길이 60미터의 두개의 입구가 있고,

극장의 뒷부분은 화사한 색상의 대릭석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커다란 대문이 있었다.




 삼단으로 된 관중석의 첫 Level 통로


 


 극장 안의 1단 관중석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사람들이 앉거나

티켓 값이 비쌀 것 같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


 


 돌로 잘 다듬어진 관중석...


 


관중석 level 2 로 올라가서...

 

 


 2단 관객석 중앙에 서 있는 남편


 


 2,000 여년 전에 무대에 올렸던 공연을 상상하면서...


 


극장 한 쪽은 여전히 발굴과 보수 작업을 진행하느라

철조망으로 쳐져 있다.

 

 


 공연 장소로 지금이라도 최고 수준급이다.



 


 

 


늘 관광객들로 붐비던 무대가 비워지자 카메라를 남편에게 맡기고

재빠르게  높다란 계단을 겅중겅중 뛰다시피 아래로 내려가서...

 

 


트로이의 헬렌의 signature pose 로 취하고 두 팔을 번쩍 들고 우선 기념 샷부터  찰칵~





그리고 극장의 acoustic 을 체크해 보려고 

큰소리로 가곡 한 소절도 불러 보고...





저 위에 서 있는 커플이 '앙코르!' 를 외치면서 박수를 보내 준다.

그리고 관중석 꼭대기까지 소리가 잘 전달된다고

친절하게 입에 두 손을 모으고 큰소리로 말 해 주었다.





2000여년 전에 참으로 지리적으로 극장의 자리로 최고로 적합한 곳을 택한 

그들의 혜안과 재능에 그저 감탄할 뿐....





무대 오른편





체계적인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에페소의 유적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고대 문명의 꽃을 보여 줄 것 같다.





극장의 끄트머리 지점의 대리석 길에서...





 

 



 극장을 나와서 다시 한번 돌아 보고...

 



극장에서 조금 내려 오면 오른편에 보이는 상업적 아고라(Commercial Agora)

 



아고라를 향해 있는 아치




극장에서 셀서스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대리석 길 (Marble Street)

위의 에페소 지도에 6번에 해당





대리석 길과  왼편의 벽과 기둥들...




대리석 거리에서 극장쪽으로




이 부서진 조각들을 다시 조합해서

2,000년 어떤 모습을 띈 건물인지 무척 궁금하지만

상상력의 부족인지 얼른 감이 오지 않는다.





날씨가 너무 뜨거워서 사람들이 그늘진 곳으로 자연적으로 몰리는 대리석 거리





언뜻 보면 올빼미 같은 문양의 돌들이

바로 뒤에 서 있는 유명한 셀서스 도서관 앞에 버티고 있다.





대리석 거리 오른편에

널리 잘 알려진 셀서스 도서관(The Celsus Library)가 기다리고 있다.

(위의 도표 4번 건물)






 

계속해서 셀서스 도서관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