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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Books

200 주년을 맞는 매리 셸리 작의 프랭켄슈타인(Mary Shelley's Frankenstein at 200)

by Helen of Troy 2018. 11. 1.



1831년에 출판된 책에 등장한 프랭켄슈타인의 모습이 묘사된 첫 삽화



2018년은 영국의 여류 소설가 매리 셸리가 쓴

'프랭켄슈타인'이 세상에 나온지 2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따라서 지구촌 여러 곳에서 올해 1월부터 600여 차례에 걸쳐서

다양한 전시회, 공연과 이벤트가 지속적으로 열리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때에 읽어서 희미해진 기억으로 사라진 프랭켄슈타인과

40여년만에 책을 다시 읽으면서 다른 시각과 경험을 통해서 새롭게 만나 보았다.


이 소설이 출판된 후로 이 소설과 주인공은 

단순한 한 소설에서 전설이 되어 갔으며, 

문학계 뿐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를 반영해 주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과 그리고 사회적인 통념과 가치관에 대해서 

다양한 매체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현재에도 제시해 주고 있다.





작가 매리 셸리(Mary Shelley)



1818년에 'Modern Prometheus'(현대의 프로메테우스) 혹은

'프랭켄슈타인'을 쓴 작가로 잘 알려진 매리 셸리는 

영국 런던에서 1797년 8월 30일에 태어났으며, 

유명한 영국의 시인 퍼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와 1816년에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한지 2년후, 그녀가 불과 21세가 되던 1818년에

불후의 명작 'Frankenstein' 소설이 세상에 나왔다.





매리의 남편 시인 Percy Shelley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 빅터 프랭큰슈타인이 어떻게 '괴물'이 살 수 있게 했는지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매리는 위에 보이는 판화에 묘사되었듯이

1804년에 루이지 갈바니(Galvani)와 그의 조카 알디니(Giovanni Aldini)가

'동물의 전기'(animal electricity)에 관한 연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Credit: The Morgan Library & Museum



매리 셸리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프랭켄슈타인은 

미술, 조각, 문학등에 다양한 해석과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최소한 170개의 영화에 등장해서 책보다 필름 속의 이미지로 더 잘 알려졌다.


그 중에, 페미니스트 프랭켄슈타인, 동성애자 프랭큰슈타인,

다양한 정치계층의 프랭큰슈타인의 모습도 있었고,

프랭큰슈타인 캠프도 존재했으며,

과학적인 측면에서부터 자본주의에서 인종차별과 전쟁등

다양한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기도 했다.


맨해탄에 위치한 모건 도서관 & 박물관(Morgan Library & Museum)에서

열리고 있는 프랭큰슈타인 200주년 기념 행사인

“It’s Alive! Frankenstein at 200" 의 기획자 엘리자베스 델린저씨는

"이 소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을 드러내는 소설로,

나 역시 괴물(Monster)일까? 라는 질문을 던져준다." 라고 말했다.



소설 "Frankenstein" 은 1818년에 작가 이름없이 무명으로 출판되었다가,

1831년부터 출판된 책에는 매리 셸리의 이름이 드디어 작가로 나온다.

Credit: The Morgan Library & Museum



잘 알려진대로 프랭큰슈타인은 세찬 푹풍이 몰아치던 1816년 한 여름날에 창조되었다.

매리와 남편 퍼시 셸리 그리고 바이런 경을 포함한 지식인들이

스위스의 한 호숫가에 위치한 빌라 별장에 초대되었다.

며칠간 잔뜩 찌뿌린 날씨가 이어지자,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경쟁을 하듯이 각자 꾸며낸 귀신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어느날 밤, 매리는 "두 눈은 감았지만, 통찰력을 통해서

보는 내면의 눈은 훌륭하며 창백한 학생의 모습의 괴물이 그려졌다."

그리고 후에 그녀는 "이 캐릭터는 '끔찍한 나의 자손' 이며,

우리가 사는 자연의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에게 말을 건네고,

호러(horror)에 눈을 뜨게 된다" 라고 책머리에 밝히기도 했다.



스위스에서 시작된  '프랭큰슈타인'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는 

그 별장 미팅으로부터 2년후 1818년에 무명으로 출판되었으며,

출판되자마자 사람들의 상상력을 발동시키면서 큰 인기와 관심을 끌었다.

그때부터 소설 장르만이 아니라 신화이기도 하고 cult 적인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다.





매리 셸리의 'Frankenstein' 을 각색해서

1931년 배우 보리스 칼로프가 주연을 한 영화의 포스터



프랭큰슈타인 소설을 읽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사람들의 시신부위를 짜깁기해서 만들어진 괴물이나

1931년에 제작된 영화에서 초록빛 피부에 목에 나사가 박힌

보리스 칼로프씨의 모습은 익히 잘 알려졌다.




셸리가 원래 창조한 괴물은 달변가이며, 철학적이었는데,

연극무대로 올려지면서 웅변 재능이 사라져버렸다.

유명한 판토마임 배우였던 쿡(T. P. Cooke)씨가 위에 보이듯이

연극 무대에서 말주변이 어눌한 프랭큰슈타인 역이 보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CreditThe New York Public Library



인기리에 책이 팔리기 시작한 초반부터 작가가 만들어 낸

철학적이고 달변가의 캐릭터에서 

1823년에 이름도 없는 괴물 캐릭터를 유명한 판토마임 배우인

쿡씨가 연극무대에서 말도 어눌하고, 두뇌도 모자라는 얼뜨기 캐릭터로

연기를 하게 되면서 원래와 달리 틀린 캐릭터로 묘사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프랭큰슈타인이 영화로 나오게 되면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계속 남게 되었고,

과학연구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 경고의 역할도 했다.

1931년에 James Whale에 의해서 제작된 영화에서 

주인공 빅터의 한 대사중에서,"Now I know how it feels to be God!"

(이제 나도 신이 된 기분이 어떤지 알겠다.)라는 대사는

많은 사람들의 이슈가 되었고, 검열당국의 대상으로 자주 오르내리기도 했다.




1910년 에디슨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필름에서 셸리가 창조한 프랭큰슈타인이

살아서 움직이는 모습으로 처음 소개되었다.

Institute of the Arts Library Special Collections



그 후부터 '신처럼 행동하기'(playing God) 오만함은

원자폭탄, 인공지능(AI), 유전공학, 나노 테크놀로지 등

인간의 존엄성과 조물주의 권한을 위협할 수 있는

획기적인 테크놀로지가 개발될 때마다 대두되어서 논쟁의 핵심이 되기도 했다.


혹자에게는 프랭큰슈타인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캐릭터만이 아니라,

'Frankenfoods', 'Frankenscience', frankenwords' 등 

다양한 새로운 단어의 접두사로 사용되면서

기적인 과학 연구개발에 관해서 공공적으로 논리적인 논쟁에 자주 거론되기도 했다.


아리조나 주립대학교의 문학가인 에드 핀(Ed Finn)씨는 

프랭큰슈타인 스토리를 액면 그대로 심플하게 받아 들이면

위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프랭큰슈타인에 관해서 진지한 대화를 통해서

창의적인 과학과 인간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책임감이

상호적으로 깊은 유대관계에 포커스를 맞출 수 있다." 고 평했다.




올해 10월에 미국 브루클린에 위치한 그린웃 묘지의 지하 카타콤에서

공연된 "Sketches From Frankenstein"에 연기를 하는

괴물역을 맡은 제레마이어씨(Joshua Jeremiah: 오른편)가

그를 만든 과학자인 프랭큰슈타인 박사(Brian Cheney역)를 공격하고 있다.

 Credit: Joe Carrotta



하바드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인 D. Lynch 는 이 소설은

초자연적인(사회에 인정받는) 창조물과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라며

"이 소설은  '만약 내가 내 자식을 싫어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만약 내가 아버지의 뜻을 어겨서 실패한 인생이라면?'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  라고 평을 했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많은 동성애자들이나 트랜스젠더 예술가들이

그들의 부모나 가족, 그리고 나아가서 사회로부터

거부당하고, 멸시받고 때로운 두려운 존재로 전락하는 것도

일맥상통한 점이 많다고 보고 앤디 워홀의 "프랭큰슈타인을 위한 살' 작품처럼

그들의 예술 작품에서 프랭큰슈타인 혹은 괴물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셸리의 괴물을 라발씨(Victor LaValle)가 

만화 "Destroyer" 에서  흑인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Credit: BOOM! Studios



프랭큰슈타인은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 그들의 소설에서 새롭게 등장해 왔는데,

그 중 하나가 이라크 출신 소설가 아메드 사다위씨가 쓴

정치적 소설 "Frankenstein in Baghdad" 에서는

전쟁 중에 폭탄으로 사망한 시신을 제대로 장사를 치루어 주기 위해서

한 행상인이 찟겨진 시신을 꿰맞추게 되는데

결국에 무자비한 살인자로 둔갑하는 괴물로 묘사되었다.






로맨틱 시대에 쓰여진 '프랭큰슈타인'과

 빅토리아 시대에 조지 버나드 쇼가 쓴 '피그맬리언(Pygmalion)'은

아주 다른 사회적인 배경에서 쓰여졌고, 줄거리도 상이하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이 흡사하다.


가장 흡사한 점은 빅터 프랭큰슈타인과 히긴스 교수는

원래의 인물이나 사물에서 아주 딴판인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프랭큰슈타인은 다수의 인체의 부위를 조합해서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고,

히긴스는 하류층 출신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 여인에서

상류층의 숙녀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둘 다 원하는대로 계획된 변화를 성공시킨다.




버나스 쇼의 희곡 '피그맬리언'을 영화로 각색된 'My Fair Lady" 에서...



그리고 두 주인공 각각 인격적인 결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세계에서 평판도 좋고, 인간관계도 다양한 점과

그들은 상류층 출신이고,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둘 다 초반엔 그들이 시도한 액션에 대해서 큰 회의를 품고

실행에 옮기지 않을 생각까지 한 것도 비슷하다.


프랭큰슈타인은 잘 알려진 과학자였고,

과학자가 아닌 히긴스 역시 일라이즈를 사람으로 취급하기 보다는

'실험' 이라고 부르면서 연구의 대상이었고,

프랭큰슈타인 역시 그가 만든 창조물이 신체적으로 인간이었지만,

늘 'creature' 로 대하면서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다.


셸리와 쇼 두 작가는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갈망하지만,

그로 인해서 발생한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기도 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되었다.

그 예로 히긴스는 일라이자가 상류층의 세련된 숙녀로,

프랭큰슈타인은 그가 창조한 'creature'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프랭큰슈타인은 공상과학 소설 장르이면서도 미술을 반추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주인공 빅터 프랭큰슈타인은 과학자이기도 하지만 조각가의 비중이 크다.

그리스 신화에도 나오고 오비드가 쓴 'Metamorphoses' 에 등장하는

조각가 피그맬리언이 만든 조각작품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프랭큰슈타인도 그가 만든 창조물이 생명체로 변신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쿠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나 죠지 브락(Georges Braque)같은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발견 할 수 있듯이

셀리는 프랭큰슈타인이 새 생명체를 짜깁기해서 온전한 믈체를 만들듯이

콜라지에서 몽타쥐등 현대 미술가들의 다양한 장르와 기법으로 

세상의 조각들을 짜깁기해서 작품을 완성하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Boris Karloff in 'The Bride of Frankenstein' (1935)

Photograph:Universal



이 소설이 출판된 1818년은 엘긴경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조각상들을 떼어다가 대영박물관에 설치한 해이기도 하다.

이 조각작품들은 사람들에게 완벽한 인간 신체의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인식되었지만,

셸리는 원래의 자리를 벗어나서 덩그러니 박물관에 놓여진 조각상들이

아름답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하모니와 균형이 결여되었다고 보았다.

마치 프랭큰슈타인이 그가 만든 생명체를 보고

"오 주여, 그의 노란 피부는 피부 아래에 있는 동맥과 근육마저 감추지도 못한다." 

라면서 윤리적인 면이 아니라 오직 외관상 보기 흉하다는 이유로 절망한다.


프랭큰슈타인은  가장 아름답고 건장한 창조물을 만들기 위해서

 아름다운 얼굴부터 균형잡히고 수려한 몸체가 있는 신체 부위를 짜깁기 해서

2 미터 40 cm에 키의 거인을 만들었지만,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과 사랑에 빠지는 피그맬리언과 달리,

피그맬리언은 그의 창조물을 혐오하게 된다.




The Raft of the Medusa (메두사의 뗏목)

by Géricault

Photograph: Heritage Images



소설의 주인공은 독일 바바리아 지방에 위치한 잉골슈타트 대학교에서

자연 과학을 공부하면서 그의 괴물을 만들게 된다.

항생제가 개발되기 훨씬 전이고,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시기에

셸리에게 의학이란 과학이라기 보다는 예술에 근접해 있었다.

의사가 아니라 예술가들이 해부학 실험실이나 

장의사를 찾아가서 인체를 파악하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출판 연도인 1818년에 젊은 프랑스 출신 화가

테오도르 제리콜(Théodore Géricault)은 이듬해에 파리 살롱에 출품할

작품을 야망차게 준비하고 있었다.

이 작품의 폭은 7미터가 넘는 대작으로

1816년에 프랑스 해군의 배가 난파되어서

생존자들이 뗏목에 올라타서 표류하다가 서 아프리카 해변에 도달해서

뗏목위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급기야 식인종으로 전락하는 사건을 주제로 한

'메두사의 난파' 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데,

그는 이 작품의 정확도를 위해서 장의사를 찾아가서 시신을 관찰했다.


해부학은 미술가들에게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졌기에,

스텁스(George Stubbs) 는 말을 해부해서 농장 지붕에 걸어 놓고,

시신을  한꺼풀씩 벗기면서 말의 뼈, 연골, 근육, 힘줄, 신경조직, 

동맥, 정맥과 호르몬 샘 등 다양한 세포조직을 자세히 관찰하고 연습을 거쳐서

완벽한 경주 말 그림들을 완성하기도 했다.


이처럼 스텁스나 제리콜은 대단한 걸작품을 그리려면,

정확한 해부학에 근거해야 된다고 믿었기에,

장의사나 시체실을 돌아 다니면서 현실과 가깝게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마치 셸리가 소설에서 프랭큰슈타인의 신체를 묘사하듯이

제리콜도 시체의 부분을 짜깁기해서 그로테스크한 물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1819년에 살롱에 출품된 위의 작품은

이미 사망한 시신과 죽어가는 사람들과 먹히고 남은 신체들로 둘려쌓인

생존자들은 수평선 멀리 보이는 배에 구조를 요청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Two Old Men Eating Soup (수프를 먹고 있는 두 노인들)

by Francisco Goya. 

Photograph: Heritage Images


스페인 화가 고야는 마드리드 근교에 있는 집을 사서

벽에 마녀등 기괴하고 참혹한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1819년부터 고야는 14개의 참혹한 '검은 작품'들을 그리면서

작품의 주제가 아무리 하잘것 없고, 그로테스크하고 절망적이라도

있는 그대로를 묘사할 수 있는 자유를 표출하고자 했다.

마치 프랭큰슈타인이 시신으로 조각작품을 창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The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안개낀 바다 위의 방랑자)

by Caspar David Friedrich’s 

Photograph: Elke Walford



독일 출신 화가 프리드리히(Casper David Fridrich)가

1818년에 그린 "안개낀 바다 위의 방랑자" 라는 작품에서

안개가 덮히고 어름이 낀 황량한 바다와 폐허가 있는 해변을 

홀로 걷는 하이커에서 '무상함'와 '허망함' 을 묻어난다.

이 작품은 프랭큰슈타인이 빙하가 있는 바다를 바라 보면서

 “For some time I sat upon the rock that overlooks the sea of ice. 

A mist covered both that and the surrounding mountains.”

라고 절규하는 모습과 쉽게 오버랩이 된다.




The Nightmare (악몽)

by John Henry Fuseli, circa 1754. 

Photograph: Universal Images Group


매리 셸리의 어머니 매리 월스톤크래프트(Wollstonecraft)는 매리가 태어난지

10일 후에 출산후의 감염으로 사망했는데,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의 권리를 위한 책도 쓴 작가이자,

철학자였으며, 미술에도 재능이 많은 여성이었다.


어머니 매리 또한 제리콜, 프리드리히, 고야 등

차세대  미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소설속의 프랭큰슈타인이 살았던 스위스 출신의

헨리 퓨젤리(Henry Fuseli) 도 그녀의 영향으로

기괴한 악마가 자고 있는 한 여인의 배 위에 평온하게 앉아있는

유명한 작품 '악몽' 을 1781년에 그렸다.


이 그림은 프로이드가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주장하기

훨씬 전에 꿈의 실체를 묘사한 그림으로 잘 알려진만큼,

후에 프로이드는 이 그림을 그의 비엔나 아파트에 걸어 두었다.


 비슷한 철학과 미술에 대한 사랑을 가진 어머니 매리와 퓨젤리는 

나중에 서로 만나게 되고, 둘 다 기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에 빠진다.

퓨젤리는 두 여성이 한 남성의 쾌락을 제공하는 그림을 다수 그리기도 했는데,

매리는 그가 그의 아내를 버리지 않을 것을 알기에 절망에 빠지게 되고,

그를 잊기 위해서 쓸쓸히 프랑스를 떠난다.


셸리는 이 같은 고딕 러브 스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녀의 글 속에  프랭큰슈타인이 그가 만든 창조물이 살아 움직이자 놀란 그는 

자고 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휴면 대신에 기괴한 창조물이 그의 위에 서 있는 악몽을 꾸는 장면이 묘사된다.

이는 퓨셀리의 작품 '악몽'에서 튀어나온 듯한 장면이다.


어머니 매리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준 퓨젤리가

딸 매리에게 조병적인 로맨틱 창조자의 이미지를 제공해 준 점이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그녀의 소설은 프랭큰슈타인이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죽이면서

그에게 벌하는 괴물처럼 복수의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German Girl(독일 소녀)

by Hannah Höch

1930, photomontages


독일의 다다이스트(dadaist) 미술가인 한나 호흐의 1930년 포토몽타지 작품

'독일 소녀'를 "부엌에서 사용하는 칼로 잘라서" 만든 몽타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사진을 잘라서 그로테스크하지만 친근한 이미지의 얼굴을 지닌

괴물을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이처럼 셸리가 창조한 프랭큰슈타인의 캐릭터는

출판된지 200년이 지난 현재까지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괴물적이고

악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상기시켜 줄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의 액션으로 많은 생물체들이 이미 멸종되었거나 멸종 위기에 처해 있고,

환경오염도 가속적으로 심각해지고 있다.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이제는 공상소설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수많은 프랭큰슈타인을 창조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가 존재하는 요즘에 

발전이라는 명목아래 (주로 이익을 창출하려는 목적으로)

인간은 지구촌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할 수 있는

신종 생명체나 무시무시한 화학 무기, 약물 등을 

마치 신이 된 것처럼 오만하게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

따라서 생태계에 미칠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대한 양심적인 연구와 

그에 대응할 책임이 점점 더 절실하다는 생각이

프랭큰슈타인 출판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머리에서 오랫동안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