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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Log/스페인

[스페인 세비야1]Sevilla & 알카자르(Alcazar)...

by Helen of Troy 2010. 8. 28.

6일간 머물렀던 바르셀로나를 뒤로 하고, AVE 고속기차를 타고,

바르셀로나에서 약 500 km 떨어진 마드리드에서 잠시 경유해서(마드리드는 이미 두번을 방문을 했기에)

이번 여행의 두번째 행선지인 세비야로 바로 향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약 1000 km 떨어진 세비야는 

스페인의 남서부 지방인 안달루시아의 수도로 역사와 문화가 담긴 도시이며

모짜르트 작곡의 오페라 세빌리야의 이발사와 돈 죠바니,

그리고 비제 작곡의 카르멘의 배경이기도 해서 귀에 많이 익은 도시입니다.

 

세비야 대성

 

그리이스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Sevilla(영어로는 Seville, 세빌이고, 흔히 세빌리야라고 하는데 정확한 발음은 세비야 이다) 는

헤라클레스(Hercules)가 세워 졌다고 전해지지만, 페니키아인들과 그리스 상인들이  기원전 12세기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

고대 문명의 하나인 타르시스(Tharsis) 인들이 이미 이베리아 반도의 남서부 지방에서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8세기 즈음에 이들의 자손들이 구아달퀴비르  강변에 (Guadalquivir River) 터전을 잡고

도시 이름을 Ispal 이라고 명명한 것이 ( 후에 Hispalis 라고 개명을 했다)

지금의  세비야의 시작이라고 역사학자들이 보고 있다.

 

기원전 3세기부터는 북아프리카에서 온 카르타고인(Carthaginians)들이 한동안 지배를 하다가

206 BC 에 시피오 마프리카누스 정권때에 로마 군대에게 패배 후에 이 지방은 로마제국의 영토로 바뀌면서

쥴리어서 시저가 기원전 45년에 정식으로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지정될 만큼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로마제국이 쇠퇴하면서, 점차 반달족(Vandals)과 비지고트족들(Visigoths)의 침입이 잦아졌고,

6-7세기에는 비지고트족들이 이 곳을 장악하다시피 할 당시

 세비야는 유럽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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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cazar의 입구(사자의 대문)

 

약 1000년간 유럽 출신인 로마제국과 비지고트족의 지배를 받아 오던 세비야는

712년부터 아랍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현재의 세비야라는 이름도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북부 아프리카에서 건너 온 아랍인들이 세운 무어 왕국의 토대인 알모하데스(Almohades) 문화가 1147년에 세비야에 도달하면서

그들은 당시 무어 왕조의 정치,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자 수도였던 코르도바(Cordoba)에서 세비야를 새로운 수도로 지정하면서

500여년 동안 아랍-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심지로 자리매김을 했다.

현재까지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드는  세비야의 여러 명소인 

the Giralda, The Torre del Oro, The Alacar and Macarena Wall 등이

그 당시 그들의 막강한 세력과 찬란했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500년간 무어왕조의 영향을 받아 온 세비먀는 1248년에  캐톨릭 스페인의 국왕인 페르디난드 3세기 이끄는 군대가

그 지방을 지배하던 무슬림들을 추방하고, 무데하르

(Mudejars: Muslims 들이 개종하지 않은 채 크리스찬 영토 내에 사는 사람들)과

이 지방에서 역시 1000년 이상을 살아 온 유대인들을 살게 허용하되,

스페인 사람들의 세력을 권장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중부 카스틸 지방 출신 24,000명들이

이곳으로 이주을 해서 이 지방은 명실공히 캐톨릭 안달루시아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 



 

The Giralda (히랄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종교가 이슬람에서 캐톨릭으로 개종되자 새로운 교회 건축공사가 활발했고,

이미 기존 해 있던 대부분의 모스크(이슬람 회당)들도 교회로 변경되었다.

세비야의 수호성인이기도 한 페르디난드 3세는 그의 카스틸 왕정을 세비야의 알카자르로 옮긴 후에

1252년에 사망할 때까지 알카자르 궁전에서 지냈다.

 

페르디난도 왕을 이어 받아서 스페인의 왕이 된 그의 아들 알폰소 10세는

 아버지가 벌려 놓은 여러가지 사업을계속 진행 시키면서

종전의 무어 시대처럼 유대인, 아랍인, 그리고 크리스찬들이 함께 어울려서

평화롭게 공존 해 사는 시대를 다시 열어서 문화와 여러가지 학문이 발전하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1350-69년 사이에  베드로 1세( Peter I of Castile) (1350-69) 의 통치하에,

세비야는 계속적으로  발전과 확장을 거치면서, 알카자르도 무데하르 양식의 궁전으로 아름답게 재건축되었다.

 

1401년에는 세비야 한복판에 무어인들이 지어 놓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무슬렘 회당 자리에

히랄다(종 탑, the Giralda)와 오렌지나무 정원을 제외하고

회당건물를 바탕으로 고딕 양식으로 대성당이 지어졌다.

이 성당은 현재까지 유럽에서 제일 크고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대성당으로 남아 있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에,

캐톨릭 스페인 사람들이 무어들의 최후의 고지였던 그라나다 도시를 완전 장악하면서

세비야에서 1000년동안 터전을 잡고 살던 무어인들과 유대인들을 대추방을 단행했고

북미, 중미와 남미에 걸친 신대륙 식민지에서 제공하는 풍부하고 무상으로 공급된 자원으로 무역이 성행하면서

무역을 총괄하는 상업협회 (Chamber of Commerce)본사도 이곳에 세워졌다.

따라서 세비야는 16세기에 스페인에서 제일 부유하고 앞서가는 국제적인 도시로 도약했다.

 

 

돈셀라 정원(Patio de las Doncellas (Alcazar 내))

 

칼로스 1세가(독일에서는 칼로스 5세로 불리워짐) 1519년에 스페인의 황제로 등극할 즈음에는

광활한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벌어 들인 돈 덕분으로 스페인은 유럽에서 제일 막강한 세력과 재물을 자랑하는 국가가 되었고,

식민지의 물자를 가득 실은 거대하고 많은 무역 상선들이 대서양을 건너서 구아달퀴비르 강을 거슬러서 

유럽의 첫 항구도시인 세비야는 자연히 도시의 크기도 확장되면서

15세기 말경에는 인구 수도 15만에 달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세명의 미술가로 존경을 받는 Velazquez(1599), Murillo(1617) 와 Valdes Leal(1622)이

국제적인 상업도시인 세비야에서 탄생해서 넉넉한 재정적인 후원으로 많은 걸작품들을 후세에 남겼다.

 

약 200년간 발전을 거듭하던 세비야는 17세기에 들어 서서 점차 내리막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전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 역시 세비야에서도 그 위세를 떨치면서 도시의 인구가 반 이하로 줄어 들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1680년에 무역선이 드나들던 구아달퀴비르 강이 막혀서

 그들의 돈 줄인 무역 상선들이 항구로 들어 오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따라서 인도와 교역하던 무역선들도 세비야에서 교통이 원활한 카디즈로 옮겨졌고,

급기야는 줄어드는 무역량으로 상업 협회도 도시에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높은 이윤을 안겨 주는 담배 종목만은 monopoly 로 거래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들어 서서  독립전쟁 후 세비야는 엘리사베스 여왕 통치 시절에 새로운 황금기를 보내면서

새로운 길과 건물 공사로 도시의 르네상스를 맞았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세비야는 두번에 걸쳐서 대규모의 박람회를 개최해서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도시의 위상을 되돌리고, 안달루시아의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1929년에는 라틴 아메리카 박람회와 63년 후인 1992년에는 유니버살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열었다.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수천년간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세비야의 명소를 보려고

세계 각국에서 몰려 드는 관광객들 덕분에 서비스 산업이 주종을 이루면서

스페인이 자랑하는 멋진 관광도시로 굳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세비야 관광을 떠날까요...

 

세비야 기차 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예약을 해 둔 호텔로...

길이 아주 좁아서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려서 호텔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 섰다.



 

 

왼쪽으로 돌면..

100년이 휠씬 넘는 오래 된 빌딩이지만 얼마 전에 대대전인 보수 공사를 거친 아담한 3층 건물의 호텔이다.

 

 



 

제일 위에 사진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더 좁은 골목 아래에 분위기도 좋고 인기가 좋은(값도 비싸다) 식당이 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좁디 좁은 골목이 많은 이유 중에 하나가 몇달씩 뜨거운 태양의 이 도시에 그늘을 제공하기 때문이란다.)

 



 

호텔 반대편에 보이는 이 집들은 개인 집들이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색상이 무척 맘에 든다.

 

 



짐을 풀고, 샤워도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아까 택시에서 내린 조금 더 넓은 길로 다시 나섰다.

왼편에 유명한 세비야 대성당의 모습이 보이고,

햇볕이 워낙 강한 곳이라서 길 위에 쳐 놓은 천막이 제공하는 그늘 덕분에 40도의 날씨라도 돌아 다닐 만 하다.

 

 



세비야 대성당의 여러 입구 중에 하나인 입구와 종탑...

여기서 오른쪽으로 꺽으면...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고 여성적인  세비야 대성당이 기다리고 있다.

 



 

이 길은 전차만 다니고, 보통 차가 다니지 못하기에  많은사람들이 길 한가운데를 활보하고 다닌다.

월드컵 축구 경기에 스페인 팀이 우승을 할 때마다 이 길에 사람들이 꽉 차서 밤 늦게까지  파티가 열리곤 했다.

 

 



다음날에 관광 예정을 잡아 둔 세비야 대성당을 지나쳐서

대성당 바로 옆에 있는 알카자르(Alcazar) 궁전으로 향했다.

 

이 아름답고 유명한 알카자르 궁전의 장소와 얽힌 배경은 이 지방의 역사처럼 복잡하고 구구하다.

8세기부터 아프리카에서 침입 해 온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세비야는

그들의 수도로 지정되면서 10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서

특히 1147년부터 1237년간 안달루시아를 지배한 Almohad  시대에

아랍인들의 화려한 궁전을 짓기 시작해서 페르니단도 2세 대왕이 1248년에

그들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밀어 낼때까지 무어인들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1248년에 세비야를 다시 장악한 페르디난도 대왕은 알카자를 궁전을

이슬람 스타일에서 부분적으로 개조를 한 후에 카스틸 왕조의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인 알폰소 13세기 중반에 왕은 낡아가는 알모하드 궁전을

당시 새롭게 등장한 고딕 양식으로 보수 공사를 했고,

그 후로도 스페인의 국왕들은 톨레도와 그라나다의 유능한 건축가들의 재능을 바탕으로

크리스찬과 이스람 문화가 잘 조화 된 양식으로 지속적인 증축공사를 거듭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오후 2시의 기온은 이미 40도에도 불구하고 알카자르의 대문으로 씩씩하게 걸어 갔다.

 


 

사자 대문 ( Wall of the Dar-al-Imara (913-14) Puerto del Léon)

 

 


 Patio del Léon (사자 정원) 가운데

사자 대문을 통과하면 정원이 눈이 들어 온다. 

이곳은 이슬람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이곳은 도로에서부터 개인주거지 사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This patio is separated from the one behind it,

 the Patio de la Montería, by a large wall with three arches.

In the plan of Islamic palaces this patio would have been the Mexuar,

the space between the street and the private residential area.


 

 

정원 왼쪽...


 

 

아취 뒤에 베드로 궁전의 입구가 보인다.



 

 

아치를 통과해서 입구쪽을 향해서...

 



 

베드로 궁전 입구... (The facade of King Don Pedro's Palace--on the southern side of the Patio de la Montería)

 

 



베드로 궁전 오른편...



 

베드로 궁전 건축 공사는 1364년에 시작해서 1366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무데하르 양식(Mudejar 크리스찬과 이슬람의 문화와 건축 양식의 퓨젼) 으로 지어진 것이 특색이다.

이 건축 공사를 위해서 멀리 떨어진 그라나다와 톨레도의 장인들이 대거 투입해서 카스틸 왕조의 첫 궁전 공사를 맡았다.



 

 

  

 베드로 궁전의 디테일



 

 

 



 

    

베드로 궁전 정원에서...




 

 

 

 궁 안으로 들어 가면..

 

Chapel of the Casa de la Contratación 

a site founded by the Spanish monarchs in 1503 for seafaring and scientific research

 



 

 

 




카스틸 왕가,,,



 

 

 



 

옆방으로 옮겨서..

 

 .



 

골드와 블루의 천장   그리고  핑크와 마룬의 벽

 



 

Alejo Fernandez) 알레호 페르난데스 작의(1535) 스페인 선원들의 수호성녀인 마돈나를 주제로 한 제대 벽화

 


당시 아주 드물게 이 벽화 중심의 성모 마리아의 망토 한쪽은 신대륙의 인디언들을 보호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 앞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왕이자 스페인의 왕인 칼로스 5세, 페르디난도 국왕과 이사벨라 여왕이 묘사되었다.

왼쪽편에는 (성모님의 오른편)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와 그와 함께 탐험길에 나섰던 핀존의 모습이 보이고,

성모님 아래에는 16세기 당시에 해상의 최고 강국이었던 스페인의 여러 종류의 배들이 소개되었다.

 

 

 



 

다음 포스팅에 아름다운 알카자르 궁전이 게속해서...

 

 

 

music: Romance for Guitar and String Orchestra

played by J. williams on guitar

from helen's cd collection b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