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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elcome to Wildrose Country
About me...Helen/헬렌의 일상에서

이틀 전에 돌아가신 마리로즈 엄마를 추모하면서...

by Helen of Troy 2011. 2. 2.

평소와 달리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수업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 와서 무심코 받아 보았더니

독일에 사시는 나의 양아버지인 알로이즈님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자

일단 반가워서 큰소리로 잘 지내시냐고 안부 인사를 했다.

평소에 늘 유머가 많아서 주위의 사람들을 즐는겁게 해 주시는 그분의 목소리와는 달리

많이 가라 앉은 억양으로 내 인사를 늘 하던대로 받아 주시더니

한동안의 불안하게 정적이 흐른 후에 갑자기 흐느끼시면서영어가 아닌 독일어로

마리 로즈가 30분 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알려 주셨다.

 

순간, 나도 모르게 풀석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바로 옆에 학생들이 앉아 있는지도 잊고, 큰소리로 No!, No!를 외치고 말았다.

그리고는 더 힘들어 하고 계실 아버지를 생각해서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리고

50년간 함께 살아 온 아내와 사별을 한 그분을 위해서 입으로는 위로의 말씀을 드렸지만

당장에라도 달려 가서 손을 꼭 잡아 드리고 싶기만 했다.

 

정신없이 수업을 마친 후에 바로 남편에게 연락을 했더니

역시 놀라고 슬퍼하면서 5개월만 더 살아 계시지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작년 여름에 방문해서 두분의 결혼 50주년과 우리 부부의 25주년을 함께 기념하면서

올 여름에는 80번째 생신을 맞으시는 마리로즈 엄마와 독일에서 함께 보내려고 굳게 약속을 드리고

얼마 전부터 유럽 방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고 있던 중이어서 더 가슴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마리로즈와 알로이즈 부부와의 좋고 긴 인연은  만 30년 전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로이즈 아버지는 독일의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나는 미국 은행에서 한국의 지사로 파견나온 주재원으로 각각 한국에 갔다가

당시 외국인들을 위한 성당으로 미사 참여를 함께 하면서 성당 교우로 처음 알게 되었다.

 

서울 생활 몇달 후에 나는 사는 곳에서 계약이 끝나서 새집을 알아 보고 있던 중에

선뜻 두분이 사시고 있는 집에 빈방이 두개나 있으니 집을 찾을 때까지 함께 지내자는 제의에

별 생각없이 그 집으로 이사를 가서 당분간이 아니라

내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그분들과 2년을 함께 가족처럼 살았다.

두분은 이미 2남2년의 부모였는데

당시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세명의 자녀들이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던 와중에

억수로 운좋게 그분의 다섯번째 자녀가 되어서 두분의 사랑과 보살핌 덕분으로

어릴때 부모님을 따라서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캐나다에서 성장을 한 나는

가족없이 외국이나 다름없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외롭지도 않았고,

직장일이 힘에 버거울 때도 용기를 주셔서  순조롭게 여자로서는 드물게 고도 승진을 할 수 있게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마리로즈는 그렇게 당시에는 나의 아버지나 삼촌뻘 되는  높은 자리에 앉아 계시는

중년의 남자분들과 늘 상대해야 하는 직장, 거기서도 홍일점 IT engineer로서 늘 피곤하게 일을 하는 나를

낯설고, 물설은 한국의 직장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서울에서 잘 지내게 해 주신 분이기도 하다.

 

나는 1985년에 다시 뉴욕 본점으로, 그분들은 1986년에 인도네시아로 떠난 후로

주재원들의 직장이 그러하듯이 둘 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느라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지금까지 피를 나눈 부모자식처럼  정을 나누면서 가깝게 잘 지내왔다. 

 

6개월 전에 한달간의 유럽 방문시에 빠뜻한 일정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마리로즈 엄마때문에 9일간을 일부러 할애해서

24시간 하루 종일 함께 노부부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돌려 주기 보다는

파킨슨 병으로 거동이 몹시 불편해도 여전히 예전과 똑같이 더 큰 사랑과 은혜를 얻고

1년 후인 2011년 여름에 엄마의 80회 생신에 다시 만날 기약을 하며

눈물로 작별인사를 한 후에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 왔었다.

 

 

우리들이 함께 한 마지막 시간이 될줄이야...날에 불편한 거동에도 정성스럽게 아침 식사를 준비 해 주셨다.

그리고 아쉽게 작별을 했는데 이렇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알로이즈 아버지는 결혼직후부터 하시는 일의 성격상 한국을 포함해서

수십개의 개발도상국가들을 평균적으로 5년에 한번씩 임지를 옮겨다니셨다.

그 중에서 부산에서 4년, 그리고 서울에서 5년을 살아서 한국에서 제일 오래 생활을 한 셈이다.

따라서 한두번이 아니라 마리로즈엄마는 지난 50년간을 주기적으로

문화와 언어가 생판 다른 임지로 옮겨 다니시며 부임하시는 곳의 풍습과 언어를 습득하고 적응하느라

결코 쉽지않는 타지의 삶의 연속이지만 2남 2녀를 훌륭하게 잘 키우셨고,

남편을 뒤에서 조용히 뒷바라지를 잘 해 주신 내조의 여왕으로 사셨다.

 

내가 함께 생활하면서 본 마리로즈엄마는

집을 도와주는 한국인 도우미 아줌마가 매일 오시지만

아줌마보다 더 바쁘게 바지런하게 집안일을 하셨다.

물론 집안은 늘 깔끔하고 정돈이 잘 되었지만 부담스럽지않고 푸근하고 편했다.

 

그리고 참 소박하고, 겸손하고 검소하셨다.

경제적으로 많이 넉넉하지만 집에서 쓰던 가구나, 커텐등은 거의 다가

전임자가 쓰시던 걸 이어 받아서 쓰시고,

함께 살던 연희동 집에서 가까운 연희동 재래식 시장에 가서 직접 장을 보시고,

 조그마한 것도 함부러 버리지 않으셨고,

필요한 것들만 사시고 조금이라도 남으면 남들에게 바로 나누어 주셨다.

 

그녀는 참으로 헌신적으로 남들에게 잘 베푸셨다.

나의 경우에도 그분들과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피 한방울도 섞이지 않고,

그렇다고 이해관계로 얽히지도 않은 아무도 아닌 나를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고 스스럼없이 지금까지 그 어느 피붙이보다 잘 해 주셨다.

연희동 집에 살 때도 와국인 성당에서 만난 외국인 가족들을 위해서

늘 정성이 담긴 음식을 직접 만드셔서 두루두루 대접하면서 지내셨다.

 

3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알게 모르게 그동안 그녀를 많이 닮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그녀를 보고 배우면서 지내온 내겐 당연한 일이리라.

 

이렇게 세상에서 부지런하고 깔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마리로즈 엄마에게

5년 전에 파킨슨병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이 내려졌다.

4년 전에 뵈었을때는 아주 경미한 증상을 보여서 함께 2주간 불란서와 독일을 여행을 다녀도

큰 불편함이 없어서 우리들은 그나마 많이 맘이 놓였다.

 

그런데 1년 반 전부터 상태가 갑자기 악화되어서

워커없이는 걷기도 힘들고, 거동도 많이 불편해지셔서

수많은 종류의 약에 의존하기 시작하셨다.

늘 빠른 속도로 영어, 불어, 독일어 삼개국어를 자유자재로 이야기 하시던 분이

스피치마저 어눌해짐을 전화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에 도착한 첫날 집에 도착 해 보니...

 

평소에 워커의 도움없이는 걷기도 힘든 분이 매일 엄청나게 드시는 약 기운으로

하루에 겨우 두세간씩 거동이 비교적 자유스러운 틈을 이용해서

그날 할 수 있는 일을 뚝딱 뚝딱 다 해 두신단다.

벌써 양파 파이를 점심식사로 만드시려고 양파와 베이컨을 다 준비 해 놓으셨을 뿐 아니라..

 

이렇게 뻣뻣한 손으로 파이 껍데기까지 직접 방망이로 밀고,

 

평생을 요리한 전문가답게 날랜 손놀림으로 파이 반죽을 파이 팬에 옮겨서..

 

나중에 나도 시도 해보려고 열심히 셔터는 누르는데 따라 잡기가 쉽지 않다.

 

filling 재로를 준비해서

 

파이 반죽 위에 부으시고,

 

치즈도 올리시고,

 

마지막에 달걀 푼 것을 얹어서 오븐으로..

 

발사믹 식초와 여러 허브를 넣은 살라드 드레싱도 척척 직접 만드신다.

손이 빠르다는 말을 늘 듣고 사는 나도 못따를만큼 빠른 속도로 신선한 드레싱을 만드셨다.

 

 

그리고 짜짠~~~~

엄마 집에 도착해서 온 몸의 거동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멀리서 독일까지 방문한 우리 부부를 위해서

상에 오른 모든 음식을 직접 손수 만드신 이 음식을 목이 메어서 제대로 먹을 수가 힘들었다.

 

유명한 레스토랑의 최고의 셰프가 만든 어느 음식보다 맛이 좋고 정이 담긴 음식이다.

 

 

다음날..

 

오전 11시부터 약기운으로 거동이 자유로우실때가 되자 오늘은 뭘 만드려고 하는지도 몰라도 일단 감자를 삶아서 으깨신다.

 

그리고 동네 채소가게에서 사 온 싱싱한 채소도 깔끔하게 준비 하시고,

 

beet and onion 살라드도 등장하고,

 

이번엔 대파와 비슷한 leek를 삶아서 으깨신다.

 

그리고는 아까 준비 해 둔 감자를 넣고,

 

잘 저어서 mashed potato and leek가 완성되고,

 

미리 재 둔 스테이크도 뜨거운 프라이팬에 구워 내신다.

정말 본받고 싶은 것은 무슨 음식을 만드시더라도 그때마다 정리정돈을 깨끗히 하시면서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행주나 타올들을 많이 사용하시는데 매일 매일 깨끗히 빨아서 사용하시기도 해서

도대체 그런 몸으로 어떻게 예전처럼 유지를 하시는지 경이롭기만 하다.

 

 

And....

사지가 멀쩡한 우리들은 테이블 세팅만 하고, 아프신 마리로즈엄마의 눈물겨운 정성으로 우리는 이렇게 근사한 식사를 또 했다.

품질좋은 포도주의 원산지인 불란서의 알사스 지방 출신답게 매 식사마다 값비싼 포도주가 항상 널널하게 따라 나온다.

이렇게 점심 식사를 하고 나면, 시간에 쫓기듯이 부리나케 저녁식사 준비를 해 두신다.

곧 온 몸이 덜덜 떨리는 증상이 나타 나기 전에..

 

 

그 다음날...

오늘 식사에 들어 갈 또 다른 살라드 드레싱을 만드신다.

 

호두 오일을 정확하게 재서 넣으시고,

감자도 어느새 삶아 두셨다.

 

닭고기 맛이 나는 broth도 준비하시더니

 

이렇게 잘 저으신다.

옆에서 보조하랴, 사진 찍으랴 바쁜 나는

 정작 필요한 레시피를 옆에서 보면서 적을 생각은 못한 점이 너무도 아쉬워서 가슴을 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guess what??

이렇게 또 근사한 점심을 먹는 우리는 정녕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머무는 동안 아무리 몸이 맘대로 움직여 주지않더라도

매일같이 한가지씩 정성을 다해서 요리를 만드는 그녀의 모습은

한없이 애처롭고 위태위태해 보였지만

한편 강인한 엄마의 의지가 엿보이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시간이 나는대로 83세가 되셨는데도 아프신 엄마를 옆에서 항상 돌보시느라

외출도 잘 못하시고 몸과 맘이 지친 알로이즈 아빠를 모시고 산보도 가고, 축제도 모시고 다니는 동안

나는 엄마가 거동이 좀 자유로우면 함께 뒷 마당에서 정원을 거닐기도 하고

화분도 돌보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거나

거동이 불편하고 드시는 약들의 부작용으로 심하게 정신불안증세가 찾아 들면

그녀의 손과 발이 되어서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려고 했다.

특히 목욕을 함께 하면서 씻겨 드리고, 로션도 발라 드리고 잠옷을 입혀 드리고

침대에 눕혀 드리고 잠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해 드리면 참 고마워 하시고 편안하게 주무셔서

그나마 그녀에게 뭔가를 해 드린 것 같아서 위안이 되었다.

 

 

이렇게 매일 5-star 불란서 레스토랑을 방불하게 하는 근사한 음식을 해 주시다가

우리가 떠나기 바로 전날에는 부억에서 더 분주하게 우리를 위해서 요리를 하셨다.

 

평소에 먹기 힘든 귀한 달팽이 요리를 준비 하신다.

우선 달팽이 한마리씩 베이킹 팬에 하나씩 넣고,

미리 준비 해둔 허브가 들어 간 버터를 잘라서 올리신다.

(다행히 이 레시피는 자세하게 기록을 남겼다.)

 

오늘도 색다른 살라드 드레싱을 만드신다.

 

이런 재료들이 사용되고.

 

보통 식당에서 달팽이 요리를 주문하면 한 판에 달팽이가 6개만 나오는데(그것도 아주 비싼 값에)

그녀의 넉넉한 맘처럼 이 판은 그의 두배인 12개짜리 팬을 사용해서 이렇게 오븐에 구워 내신다.

물론 깔끔하게 호일을 잘 깐 후에 구워내신다.

우리집 오븐이 이렇게 깨끗한 적은 오븐을 새로 사서 첫 3개월 정도인데...

 

이렇게 귀한 달팽이 요리가 탄생했다.

오늘은 우리 부부가 제일 좋아하는 gran cru 와인을 원없이 많이 들었다.

값이 꽤 비싼데 눈치도 없이..

 

이 식사가 그분들과 함께 하는 최후의 만찬이라는 생각에 먹다가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마직막 저녁식사로 달팽이 요리가 충분치 못하다고 여기셨는지

남편에게 아주 질좋은 양고기 스테이크가 있는데 먹겠냐고 물어 보신다.

사실 남편은 양고기에 대한 편견이 있어서 그때까지 단 한번도 어떤 식의 양고기도 먹어 본 적이 없었는데

흔쾌히 먹겠다고 했더니 금방 부엌으로 가서 양념에 재워 둔 양고기를 꺼내서 후라이팬에 구워 내신다.

물론 저녁식사때는 거동이 불편하셔서 내 도움이 많이 필요하셨지만 그녀의 marinate 덕분에

이렇게 미디움으로 알맞게 잘 구운 양고기 스테이크를 한입 먹어 본 남편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스테이크라면서

비싼 포도주를 계속 들이키면서 신나게 먹어 주었다.

이렇게 우리는 마지막 만찬을 다른날보다 오래 식탁에 앉아서 천천히 식사를 했다.

 

우리 부부는 9일간 엄마의 눈물겨운 음식과

그녀가 헌신적으로 베풀어 준 사랑과 정의 자양분으로

 몸과 맘이 정화되고 순화되어서 집에 잘 돌아 왔다.

 

 

앞으로 몇시간 있으면 공항으로 나가야 하는데

잠자기는 아예 포기하고 오래 된 사진 앨범을 들춰 보면서

마리로즈엄마와의 함께 한  소중한 추억을 천천히 더듬으면서 새벽을 기다린다.

 

 

1983년 연희동 집 앞에서.. (마리로즈의 사촌언니와 뒤에 막내 니콜이 숨어서)

당시 집 바로 옆에 있는 서울 외국인 학교에 다녔던 니콜과는 자매처럼 잘 지냈던 아가씨다.

 

  

왼편의 두 신부님을 모시고 함께 만찬을..   늘 이렇게 집에 손님을 초대해서 직접 만드신 음식을 대접하신다. (1984년 여름)

 

신라 호텔에서 가진 luckly Soul Night 행사에서 봉사하던 모습...

 

위에서 계신 흑인신부님의 환송파티에서.. (1984년 6월)

 

이렇게 집에 늘 셰계 각국에서 온 여러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모였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외국인 지인들이 모여서 조촐하게 서강대학교 체플에서 가진

우리들의 첫번째 결혼식을(며칠 후에 식장에서 두번째 결혼식을 또 했다)

마리로즈엄마가 혼자 음식부터, 꽃까지 다 손수 준비해 주셨다.

(1985년 8월, 온 가족이 다 모여서 우리 결혼을 축하를 해 주었다.)

 

1987년 인도네시아에서.. (먁내 니콜과 함께)

 

1992년 미국 볼티모어에서...

 

2000년 5월 룩셈부르크에서...

 

2006년 불란서 Strasbourg 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전에 본 엄마의 모습을 다시 그리며...

 

 

이제 엄마가 먼 곳으로 홀로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그녀의 영원한 안식을 간구하러

우리 부부는 그녀 곁으로 독일로 곧 떠납니다.

 

그동안 이 세상에서 한결같이 큰 사랑으로 친딸이상으로 베풀어 주신 엄마...

하늘나라에 가셔도 우리를 사랑 해 주실거라 믿는 엄마..

힘들고 고통이 없는 

천상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