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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 Places/넓은 세상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지 100주년을 맞이하면서..(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결과 & legacy)

by Helen of Troy 2014. 8. 5.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배경과 시작  

 

20세기 초반부터 유럽은 서로 나라간의 이해관계가 얼켜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중에

1914년 6월 28일에 사라예보의 한 저격사건을 깃점으로

한달 반 만에 유럽의 주요국가 다섯 나라가 역사상 첫 세계대전의 회오리에 휩쓸이게 되었다.

 

1914년 6월 28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였던 프란즈 페르디난드 공작과 부인이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거행된 한 군대 행사에 참석 중에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에서 물러날 것을 원하던 가브리로 프린십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저격사건을 빌미로 전쟁을 즉각적으로 선포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

 

당시 유럽의 나라들은 서로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침략하면, 삼국의 나라들이 자연히 함께 들고 일어나서

침략받은 동맹국을 방어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와,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한편 영국은 프랑스와 러시아는 벨지움과 각각 동맹국가여서 서로 얼키고 설킨 동맹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한 제국의 황태자격인 인물이 살해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당연히 세르비아를 강력이 비난하고,

세르비아에게 비현실적으로 막대한 보상을 요구 했다.  세르비아는 대부분의 요구를 들어주지만,

두개의 사항에 불응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즉각 관계를 끊고, 세르비아와 근접국가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벨그레이드를 집중적으로 폭격을 시작했고, 세르비아와 동맹국인 러시아는

바로 자국의 군대를 세르비아로 파견시켰다. 

그러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국인 독일은 7월 31일에 러시아에게 군대이동을 중단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내게 되고,

이에 러시아가 불응하자 8월 1일에 러시아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후에 전쟁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도 바로 군대를 정비해서 독일 국경쪽으로 옮기게 되자, 독일은  슐리펜 플랜(Schlieffen Plan) 이라고 불리우는

작전을 시작하면서 프랑스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당시 중립국이었던  벨지움 영토를 침범했다.

참고로, 벨지움은 1839년에 런던조약에 의해서 중립권을 보장받은 바 있다.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선포하고 바로 다음날인 4일에 벨지움에 군대를 투입했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와 러시아처럼 전쟁에 가담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우선 방관만 하고 있다가,

영국은 벨지움을 중립을 보장해 주고, 벨지움이 침략을 당하면 침략국과 대항해서 벨지움을 방어해 주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런던조약을 1839년에 맺었기에, 하는 수 없이 같은 날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고하면서

100년 전 오늘 4일에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며칠 사이에 한꺼번에 전쟁에 휘말리면서

세계 1차 대전이 시작해서, 4년 넘게 수많은 재산과 인명 피해를 남기고 1918년 11월 11일에 종전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의 결과와 영향

 

많은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20세기 초반에 유럽을 전쟁으로 몇년간 몰아 넣은 1차 세계 대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류 역사상에 발생한 커다란 주요한 사건이자 비극일 뿐 아니라,

전쟁이 끝나자 마자 볼쉐비크 혁명부터, 2차 세계대전, 유태인 대학살,

원자폭탄개발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키쳤고

간접적으로 세계 대공황, 냉전시대를 초래했다고 결론을 내릴만큼 인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1차 세계 대전으로 말미암아 막대한 재산 피해는 물론,

인명피해도 인류 역사상 상상을 초월하는 가장 큰 피해를 끼쳤다.

900만명의 군인들, 그리고 500만 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28 개국이 개입되었고,

$1,860 억에 달하는 직접적인 경비와 $1,510 억의 간접적으로 경비가 투입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비행기, 탱크과 장거리 대포, 잠수함, 독가스가 무차별한 살생을 위해서 사용되었고,

적어도 700만명이 평생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불구자로 살아야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외면상으로만 아니라 이 전쟁은 그때까지 인간이 치루었던 어떤 전쟁보다 막대한 피해를 남겼는데,

특히 정치적으로 유럽의 네 강대국의 절대군주를 몰락시켰다.

1917년에는 볼쉐빅크 혁명으로 러시아의 짜르, 191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와 독일,

1922년에는 터키의 황실의 독재시대를 마감 시켰고, 이탈리아는 파시즘의 장악이 시작되었고,

그리고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 걸쳐서 존재하던 유럽의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전쟁을 유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유럽의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면서,

그때까지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으로 세계를 리드하던 주도권을 미국으로 넘겨 주면서

미국은 이때부터 제일 막강한 산업와 채권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이 전쟁은 터키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 대학살을 초래했고,

인플루엔자 독감을 유발해서 전 세계적으로 2500만이 사망하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 전쟁은 또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누구도, 어떤 사건도

추측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을 잘 간과해 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반 유럽은 과거에 늘 크고 작은 전쟁에 시달린 것과 달리 100년간 큰 전쟁이 없었고,

지속적인 평화와 경제적인 발전을 기대하면서 희망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기대도 못하고, 원치도 않았던 1차 대전으로 유럽의 지속적인 발전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더 안타까운 것은 전쟁이 발발한지 5주 안에 그 언제라도 멈출 수 있는 기회가 수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4년 여에 걸쳐서 막대한 재산과 인명피해를 남긴 비극적인 전쟁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차 세계대전은  3가지의 인간의 결정적인 실수

(miscalculation, misunderstanding, miscommunication)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아무도 1차 대전의 규모를 상상조차 못했다. 

전쟁 초기에는  당시 전쟁 중에 사용되던 통신용 비둘기처럼

예전 방식들을 사용했지만, 점점 100만마리의 말들까지 투입이 되기까지 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탱크, 잠수함, 비행기에서 투하하는 폭탄, 계속 발사할 수 있는 자동총기,

독가스 의 개발과 사용으로 현대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는 전쟁이 되었다.

1918년에는 독일군이 독극물인 염소 가스를 포함한 최루탄을 투하하는 사건이 발생해서,

최루탄은 영국군이 착용한 가스 매스크를 벗게 만들게 하였고,

염소 가스(chlorine gas)는 가차없이  매스크를 벗은 무방비 상태의 맨 얼굴을 공격해서

많은 사상자를 초래하기도 했다.

1916년에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솜(Somme)에서 벌어진 솜 전투에서

가까운 거리에 독일군이 파 놓은 참호에서 계속 퍼부어 대는 총알세례에

이 전투에 투입된 10만명에 달하는 영국군은 어이없게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끔찍하게도 단 하루의 전투중에 6만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솜 전투가 끝났을 때에는 419,654 명의 사망자, 실종자와 부상자가 생겨난 최악의 전투로 남았다.

4년간의 피비린내나는 세계 대전으로 영국은 약 100만명의 군인이 전사했고,

150만명의 오스트리아-헝가리 함스부르크 왕조의 군인,

170만명의 프랑스, 170만명의 러시아 그리고 200만명의 독일군이 전사자가 생겨났다.

 

이 전쟁의 비극은 종전 후에도 계속해서  전쟁에 참가한 국가들에게 불신과 반감을 물려 주면서,

고작 종전협정을 맺은지 21년 후에 더 피해규모가 큰 세계 2차 대전을 발발하게 하면서

여러모로 인간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비극적인 사건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1차 대전이 발발한지 100주년을 맞이해서 전쟁에 참가했던 국가들은 100주년 기념행사를 열면서

너무도 안타깝게 참혹하게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난 수많은 군인들을 추모하였다.

 

데이빗 카레론 영국 수상이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Dud Corner 묘지에 안치된

1차 대전때에 전사한 그의 증조 큰할아버지 프랜시스 마운트 대위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 기념비를 올려다 보고 있다.

Picture: MoD/Crown Copyright

 

 

벨지움의 Mons에 위치한 심포리앙 군인 묘지에서 거행된 100주년 추모식에

영국의 윌리엄 황태자와 캐더린이 참석했다.

 

 

 영국의 보빙턴시에 위치한 탱크 박물관 앞에서 거행된 기념식에서

전쟁 당시에 참전한 제4 보병대의 유니폼을 입고

전쟁중에 숨진 100만명의 영국군을 상징하는 백만송이의 양귀비 꽃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가운데에 서 있다.

Picture: Getty

 

 

영국의 포크스토운 시에서 양귀비의 그림과 숨진 군인의 이름이 새겨진 풍선을 하늘에 띄운 모습..

Picture: Reuters

 

 

벨지움의 리지(Liege)에서 거행된 100주년 기념식에서 화환을 헌정하는 벨지움의 필립 국왕

Picture: Chris Jackson/Getty Images

 

 

영국의 황태자 비 캐서린, 프랑스 대통령 올란드와 벨지움의 마틸다 왕비가

리지에서 거행된 100주년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Picture: Chris Jackson/Getty Images

 

 

런던에서 거행된 1차대전 100주년 기념식 퍼레이드에 참가한 첼시 출신의 왕년의 군인들

Picture: EPA/ANDY RAIN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 안에 있는 무명의 용사의 묘지에 꽃을 헌화하고 있다.

Picture: Dan Kitwood/Getty Images

 

 

폴 커민스(Paul Commins) 의 작품 "붉은 피로 덮인 육지와 바다"(Blood Swept Lands and Seas of Red)에 필요한

도자기로 만들어진 888,246개의 양귀비를 런턴탑의 외호(moat)에 완성하고자

봉자사들이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이 거대한 추모 작품을 완성해 가고 있다.

Picture: Dan Kitwood/Getty Images

 

 

오스트렐리아의 수도 캔버라에서 100주년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Picture: SEAN DAVEY/AFP/Getty Images

 

 

1차 대전에 전사한 호주출신 군인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를 어린 학생들이 군인들의 이름을 읽고 있다.

Picture: SEAN DAVEY/AFP/Getty Images

 

 

 

 

1차 대전 중 포탄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연합군이 만들어 놓은 참호의 모습들...

 

2014년 8월 4일은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한지 100주년이 되는 날에

벨지움의 큰 전투가 펼쳐진 이프레 근처에 당시 영국군이 파 놓은 참호(trenches)의 보존된 모습

 Picture: Christopher Furlong/Getty Images

 

 

 

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힌 전투지 중에 하나인

벨지움의 이프레에서 약 3 km  떨어진 곳에 The Sanctuary Wood Museum  Hill 62라고 불리우는

야외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1차 대전 전에 이미 이 곳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의

손자인 쟈크 쉬어씨가 현재 소유하며, 박물관 주위에는 전쟁중에 영국군이

파 놓은 참호가 그대로 보존되어서 당시의 참혹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Picture: Christopher Furlong/Getty Images

 

 

 

1차 대전의 많은 전투 중에 가장 피해가 크고 잘 알려진 전투는 1917년 7월 21일부터 11월 6일까지

싸운 3차이프레의 전투에서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프랑스 출신의 군인들이

파센델레를 재탈환하기 위해서 치룬  격전 현장이기도 하다.

이 전투에서 양쪽 군대의 인명피해는 50만명에 달했지만, 연합군은 겨우 수 킬로미터의 땅을 탈환했다.

 

이 전투로 이 동네는 양쪽에서 쏘아대는 수많은 폭탄으로 거의 다 파괴되었고,

위의 사진은 숲에 폭탄이 터져서 만들어진 커다란 구멍들...

Picture: Christopher Furlong/Getty Images

 

 

이프레 전투는 1914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독일군과 영국군 사이에 비공식적으로 잠정적인 휴전을 하기도 했다.

 

 

1차 대전에 만들어진 참호에 방문객들의 발자국이 진흙에 남겨진 모습

Picture: Christopher Furlong/Getty Images

 

 

Picture: Christopher Furlong/Getty Images

 

 

Picture: Christopher Furlong/Getty Images

 

 

 

1차 대전중 2차 이프레 전투에 참전해서 사망한 캐나다 1 사단 출신 군인들을 기념하는

"Brooding Soldier"  기념 조각상

Picture: Christopher Furlong/Getty Images

 

 

벨지움 이프레의 Hooge 군사 묘지에 무명의 군인이 묻힌 한 묘비

Picture: Christopher Furlong/Getty Images

 

 

석양의 긴 그림자와 함께  빽빽하게 들어 선 묘비들...

Picture: Christopher Furlong/Getty Images

 

 

Picture: Christopher Furlong/Getty Images

 

 

 1400만 명의 인명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기고 종전된 1차 세계 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이한

10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는 서로 대치하고 살상을 일삼고 있는 모습을 연일 뉴스로 전해 들으면서

1차 대전의 3대 실수 miscalculation, misunderstanding, miscommunication 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재현되고 있은 현실이 참 안타깝고, 부끄럽다.

 

유럽에서 발생한 1차 세계대전만큼 큰 피해를 끼친 육이오 한국전쟁이 휴전된지 고작 60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현재까지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에 남아 있는데도,

과연 젊은 세대중 몇 명이나 전쟁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3년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과정과 인명과 재산 피해 정보를 제대로 알고 있을지 의문스럽다.

모쪼록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분석해서,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을 피하고,

통일이 오는 그날을 대비해서 제대로 준비하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램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