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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s Scrapbook/나누고 싶은 글

102세에 세계 최고령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잉거보크 레포포트 여사(Ingeborg Rapoport)

by Helen of Troy 2015. 5. 15.

 

 

102세 되신 잉거보크 래포포트(Ingeborg Rapoport) 여사가

1952년부터 살아 온 베를린의 집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Photo: Alexa Vachon for The Wall Street Journal

 

 

 

아침에 일어나면 늘 하던대로, 커피를 내리는 동안

매일 아침이면 배달되는 우리 동네 신문을 제일 먼저 뒤적거리며서 headline 을 체크하고,

그리고 랩탑을 켜고 인터넷으로 정기구독하는 5개의 신문으로 넘어간다.

 

커피와 간단하게 준비된 아침 식사를 하면서 눈에 띄는 제목의 기사부터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뉴욕타임즈에 아들이 태어나고, 7년간 살았던 필라델피아에서 발생한 기차 사고 기사부터 읽고 있는데,

옆에서 월스트리트 저널을 읽고 있던 남편이 너무 감동적인 기사가 있으니

안 좋은 기사 대신에 먼저 읽어 보라고 권해서 1시간 전에 막 올라 온 따끈따끈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기사 내용은 베를린에 거주하는 올해 102세가 되신 전직 신생아 전문 의사였던 라포포트 여사의 이야기였다.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하기 시작한지 5년 후인 1938년에 함부르크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그녀는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 아동들의 주요 사망 원인이었던 디프테리아에 관한 박사논문을 제출했었다.

 

당시 그녀의 지도교수이자, 나찌당원이기도 했던 교수마저 그녀의 논문내용을 칭찬했지만,

박사논문을 받기 전에 꼭 치우어야 했던 defence(혹은 논문발표회)를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라포포트 여사의 아버지는 독일사람으로 결혼 전 이름은 술름(Syllm)으로 개신교 신자로 성장했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유태인이라는 사실로 베를린 당국에서는 더 이상의 교육/연구계에서 몸담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38년에 나찌를 피해서 미국으로 떠난 직후의 잉거보크 술름 여사의 모습

Photo: Dr. Susan Richter

 

 

 

그녀는 '과학계로나 독일에게는 참 부끄러운 처사였다' 라고 회고했는데,

그녀처럼 대학교에 재학중인 수많은 대학생이나 교수들이 비 아랴안이라는 이유로

학계를 떠나야 했거나, 결국엔 유태인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녀가 다니던 함부르크 대학은  나찌스 이념을 제일 먼저 받아 들여서

유태인과 연관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았았고,

혈통을 연구하는 과와 식민지 주의 과까지 설치했는데,그녀와 가족은 수용소 신세는 면했지만,

그녀를 끝까지 옹호했던 지도교수 루돌프 데크위츠씨도 결국엔 감옥으로 보내졌다.

 

라포포트 여사는 1938년에 돈 한푼 없이 맨주먹으로 홀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 도착해서 그녀는 뉴욕과 볼티모어에 소재한 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48군데의 의대에 입학신청서를 보냈는데, 유일하게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펜실바니아 여자 의과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고, 의학도로 다시 시작했다.

 

그녀는 의대 졸업 후 1944년에 신시내티의 한 병원에서 첫 직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같은 병원에서 일하던 오스트리아 출신 유태인 의사이자 생물학자인 사뮤엘 레퍼포트와 1946년에 결혼했다. 

사뮤엘씨는 혈액보존에 관한 연구로 트루만 대통령상을, 잉거보크씨는 병원내의 소아과에서 인정받으면서

의학계에서 이들 부부는 주위에서 존경받는 의사로 인정받게 되었고, 곧 세 자녀도 이들 사이에 태어났다.

 

 

 

래퍼포트 박사가 1938년에 그녀의 지도교수가 쓴 편지.

이 편지엔 그녀의 조상의 혈통이 당시의 법에 어긋나기에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없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렇게 여러모로 순탄한 길을 가던 이 부부에게 뜻하지 않게도

남편인 래퍼포트씨가 공산당과 연관이 있고, 잉거보크씨도 남편처럼 공산당에 동조를 해서

신시내티의 빈곤지역에서 활동을 벌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곤역을 치루게 되었다.

세계 2차대전 후에 미국 사회에서 위협적인 사상으로 받아들여진 공산주의 배척주의가 팽배했는데

미정부에서 이들을 요주의 인물선상에 오르는 것을 알자,

래퍼포트 박사는 1950년에 소아과 회의에 참석차  스위스의 취리히에 방문했다가

그 곳에 일단 머물기로 했고, 잉거보크 여사는 얼마 후 네째 아이 임신중에 세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유럽으로 떠나서 남편과 합류했다. 

사뮤엘 레퍼포트 박사는 곧 그가 다녔던 비엔나 대학에서 직장을 얻었고,

얼마 후 그는 가족과 함께 동독으로 이주를 했다.

 

동독으로 이주한 후 사뮤엘씨는 그가 직접 생화학 연구소도 설립하는 등

2004년에 작고하기까지 연구활동을 활발히 했다고 한다.

한편 잉거보크 여사는 베를린의  Charité 대학병원내에 독일에서 최초로

신생아전문 클리닉을 설립하면서 역시 의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재개했다.

그녀는 "나는 한번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어요.  많은 인생의 굴곡이 있었지만,

돌아보면 나는 참 운이 좋은지 결국엔 다 잘 되었다고 봐요.  미국에서는 제일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고,

거기서 나의 남편도 만났고, 세 자녀들도 생겼잖아요."

그런 그녀에게도 그녀의 긴 생애에 불이익을 당했다고 여기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근래에 와서야 그녀는 오래 전에 거절당했던 독일 대학 박사학위를 받을 수가 있는지 타진하기 시작했고,

한편 하버드대학교 의대교수인 그녀의 아들 톰이  동료이며 현 함부르크 대학교 의대학장에게

그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우베 코흐-그로무스 의대학장이 이에 관해서 직접 나서게 되었다.

 

직접 발벗고 나서긴 했지만, 코흐-그로무스 학장은 이 일이 만만치 않은 것을 깨달았다.

올해 3월에 함부르크 대학교의 법률고문회에서는 그녀의 논문 원본을 찾을 수 없고,

구두 발표회를 거치지 않았고, 미국에서 이미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세가지 이유로,

그녀에게 박사학위 수여를 거부했고, 대신에 명예 박사학위를 주겠다는 제안을 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흐-그로무스 학장이나 잉거보트 레퍼포트 여사 둘 다 이 결정이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코흐 학장은 정식 절차를 밟고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쪽으로 정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책을 읽거나 컴퓨터 사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나빠진 시력이었는데,

그녀는 그에 굴하지 않고, 그녀의 친척과 동료 생화학자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인터넷에 지난 70년간 올라 온 디프테리아에 관한 연구결과를 일일이 전화로 통보를 받기 시작해서

차근차근 그녀의 구두발표 시험준비를 해 갔다.

 

예전보다 지금이 디픝리아에 대해서 숼씬 아는 것이 많다고 여유있게 말한 그녀는

어제 수요일에 코흐 박사와 두명의 교수가 그녀가 사는 베를린 집으로 찾아가서

45분간 집중적으로 질문공세를 한 후에 거의 80년이 지난 후에야

드디어 그녀에게 그녀가 부당하게 받지 못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함부르크 대학교는 오는 6월 9일에 그녀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하게 계획했는데,

그녀가 학위를 받게 되면, 세계에서 제일 고령의 나이의 박사학위 수여자가 된다.

 

그를 위해서 발벗고 나선 코흐학장은 "이 사건을 보면서, 독일의 변화된 모습을 대변해 준다"라고 평했고,

잉거보트여사는 "이번에 박사논문 발표회를 준비하면서 열심히 공부를 다시 하면서

1938년에 그녀가 얼마나 외롭고,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웠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고,

하지만 그 공부를 통해서 나의 평생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라고 학위 취득 소감을 담담하게 얘기했다.

 

 

 

 

 

잉거보트 여사의 기사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참 많은 것을 내게 제시해 주었다.

 

그녀가 긴 생애를 살면서 찾아 온 많은 난관에 부닥쳐서

주저 앉거나, 포기하거나, 원망을 일삼거나,

자기에게 불이익을 제공한 이들을 탓하고,

또 더 나아가서 사람을 불신하고 평생 삐딱하게 꼬인 시각으로 살지 않고,

어떤 상황에 봉착해도, 최선을 다해서 그 벽을 뛰어 넘으면서

자신을 꿈을 하나씩 이루면서 보람된 삶을 사는

인간승리의 좋은 표본을 보여 준 그녀와

그리고 박사학위를 딸 수 있게 도와 준 모든 지인과 가족들의 모습에

저절로 가슴이 따뜻해 지고, 살 맛이 생긴다.

 

특히 제일 위 사진에 환한 미소를 띈 그녀의 표정에서

인생을 참 제대로 잘 살았다는 자부심과,

모든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너그러움과 자애심,

그리고 긍정적인 마인드와 자신감

그리고 마음의 평화까지 배어 나와서

나도 앞으로 남은 인생을 그녀를 조금이라도 닮고 싶은 욕심을 부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