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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Log/이탈리아

[치비타 여행2]치비타 성 안으로 가는 길

by Helen of Troy 2016. 4. 28.




오래된 치비타 성으로 가는 다리 위에서...




작은 카페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와서 오른편 수직으로 선 절벽을 따라서 걸어 올라가니...




멀리 산 꼭대기 위에 고고하게 버티고 서 있는 치비타가 정면으로

 드디어 눈에 들어 온다.




길가에 있는 이 집 앞에 놓인 가운데가 축 쳐진 벤치와 균열이 간 벽,

그 자리를 메꾼 수선된 벽, 손 때 묻은 대문에서

중세의 동네에 서 있는 착각이 든다.




늘어진 전기줄이 시대를 가늠하게 한다.

하지만 아직도 시에스타 타임인지 사람의 발길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 대신에 화사한 꽃들이 여행객을 반겨준다.




치비타 성으로 이어주는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목도 마르고 더우니 일단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고...




그리고 제일 반가운 화장실이 있다는 다리 아래로 뛰다시피 향했다.





지진벨트 지역에 위치한 치비타는 1695년 6월 2일부터 7월 15일까지 계속된 지진으로

32명이 사망하고 동네의 전 주택이 심한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에도 십여차례의 지진으로 위의 다리도 수차레 파손되기도 해서

 주교좌성당과 수도원들, 정부청사들이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지속적인 지진의 위협과 서서히 지반이 마모되어 가자

급기야 1922년에 치비타 성 안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에게 대피명령이 떨어지게 되고,

서서히 주민들이 이곳을 떠나기 시작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방문 당시에 듣기로는 일년 내내 상주하는 주민은 12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

 


다리 왼쪽에 있는 이름 모를 여인의 동상을 지나서...





 함께 오르비에토에서 버스를 타고 온 러시아출신 신혼 부부를 다시 만나서

 서로 기념 사진을 찍어 주면서...





서서히 풍화작용으로 마모되어 가는 암석층...




성의 대문이 바로 올려다 보는 곳까지 다달았다.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닌데도 이렇게 유모차를 밀고 오는 가족들이 종종 눈에 뜨인 점이 인상적이다.







Gate of Santa Maria (성모 마리아 대문) 앞에서...





대물 왼편에는 잔니 궁전(Palazzo Janni)의 폐허가....




치비타 지도...





치비타는 키아로강과 토르비도 강 사이의 계곡의 한 가운데 있는

높은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오래된 동네이다.

이렇게 점점 고립된 이유는 이 지역에 흔한 투파 암석이 세월,

바람과 빗물에 지속적으로 마모되면서

점점 그 아래에 있는 모래와 진흙층도 안정감을 잃어버리면서 발생했다.


하지만 치비타는 이미 2,500년 전에 에트루스칸들에 의해서 생겨난 오래된 도시로,

당시 무역로 상의 중요한 상업도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직 남아있는 오래된 문헌에 따르면,

치비타와 근처에 있는 바뇨레지오는

원래는 같네움 레지스(Balneum Regis: 왕의 목욕탕)로 불리우는 도시로

롬바르디의 왕이었던 데지데리우스 왕이 입은 상처가

이 지역에서 솟아나는 소금 온천에서 치유된 이후로 도시 이름을 하사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774년에 이 지역을 다스리던 롬바르드 족은 프랑크 족에 의해서 패하게 되면서,

이 지역은 교황청의 영토로 넘겨졌다가,

오랫동안 여러 성주의 지배를 거쳐서

1140년에 드디어 자치적인 도시로 거듭났다.


하지만 1695년에 발생한 대 지진으로 도로와 건물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되자,

주민들이 치비타를 떠나기 시작하면서 치비타도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된 지진으로 산사태도 여러번 발생하게 되면서

치비타는 아예 버려진 도시로 전락했지만,

이곳에 거주하는 소수의 주민들이 얼마 남지 않은 치비타를 지키기 위해서

애쓴 덕분에 여전히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대문은 이 성내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이며

바뇨레지오 주민들이 당시 군림하던 성주 모달데스키 가족에 대항에서 일으킨 반란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두마리의 사자가 대문 양편에 있고

가운데에는 Reginald Pole  추기경의 상징이기도 한 독수리로 꾸며져 있다.


이 13세기에 지어진 대문은 이미 1500년 전에 에투루스칸들이

이미 지어 놓은 입구에 지어진 것이 특이하다.




작은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엄청 폼을 잡고 사진을 찍는 옆지기...


수차례에 걸쳐서 외부의 침입을 막아 준 성문답게 성문의 두께가 장난이 아니다.

뒤에 보이는 '성모 마리아의 길'을 통해서 성 안으로 들어 간다.








화산이 인접한 거리라서 투파석(vaolcano rocks)를 주로 이용해서 지어진

 성 안의 운치있는 오래된 집 앞에서...




성 안에서 주로 남편이 카메라를 매고 다녀서

평소보다 인물사진이 제법 많이 찍혀서

본의 아니게 어설픈 모델이 아름다운 풍광을 헤치는 상황이 이어진다.

(널리 이해하시길)




성 안에 위치한 자그마한 식당이 보인다.




화산과 지진이 잦은 곳 답게 투파 암석이 주위에 흔한데,

강도가 낮은 편이라서 네모 반듯하게 잘라서 벽돌처럼 쌓아서 지은 집들이 이채롭다.




성 안에 들어와서 오른편 절벽 위에서...






집 주인의 그림자도 안 보이지만

깔끔하고 아름다운 화분과 정원은 그들의 손길과 정성이 느껴지고...




집주인처럼 편안하게 그 앞에서 사진도 박고...




대부분의 집에는 이렇게 좁은 층계와 아담한 발코니가 놓여져 있다.  

 물론 작은 발코니와 계단 그리고 창틀에는  화분이 놓여져 있고...

이렇게 덥고 건조한데 누군가가 참 열심히도 물을 주고 보살펴 주나 보다.



관광객을 위한 작은 식당 겸 기념품 가게 앞에서....




성 도나토 광장 (Piazza San Donato )에 있는 한 가정집...




성 도나토 성당

로마시대의 기둥이 성당 대문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더운 날씨에 넓은 광장에 나무 그늘이 없어서 더 뜨거운 오후의 태양의 열기가 후끈하게 전해온다.


중세때에는 주교좌 성당이었던 이곳은 잦은 지진과 산사태로 더 안전한 곳인

바뇨레지오로 옮겨 가면서 동네 본당으로 전락되었다.




도나토 광장 왼편에 있는 작은 식당에 몇 안되는 손님들이 점심을 먹고 있고,

더운 날씨의 아을답게 곳곳에 먹을 물을 제공하는 수도 앞에는 남편이 갈증을 해소하고,..




윗 식당 건너편에 있는 건물 뒤에

작지만 유명한 '안티코 포르노' 식당이 있어서 점심을 먹으려고 갔더니...








오후 3시가 다 되어서 점심 식사 시간이 지나서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잠시 실망을 했지만 왼편에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겨 가 보니..







그 식당 역시 점심 시간이 지났다고퇴짜를 맞고나니

갑자기 배가 더 고파 오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든 삼세판 은 해봐야 된다는 철칙을 가진 나는 낙담하지 않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길 구석진 곳에

'Osteria Del Forno de Agnese'라는 식당 간판이 보여서

슬금슬금 안으로 들어 가서..




조금은 비굴한 저자세로 왼쪽에 보이는 식당 주방에 있는 사람에게

점심 식사가 가능하냐고 최대한으로 상냥하게 물었더니

의외로 흔쾌히 'certamente!!" 라고 웃으면서 맞아 주어서

올커니하고 이쁘게 꾸며진 식당 테라스로 들어 갔다.




일단 2시간 만에 오랜만에 자리에 앉아서 메뉴를 보고...




곧 배달된 시원한 화이트 하우스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싱싱한 토마토와 허브가 얹혀 나온 토스티타와 갓 구운 이탈리언 빵도 허겁지겁 입에 넣기 시작하고...




 메인 요리로 주문한 토마토와 바실이 곁들인 나비 모양의 파르팔레 파스타(farfalle)가

눈도 코도 즐겁게 예쁜 접시에 담겨 나오자, 그제서야 천천히 여유있게 먹었다.


쉬는 시간에도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맛난 음식을 제공해 준 식당 주인에게

넉넉한 팁으로 감사한 맘을 남겨 두었다.







치비타 3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