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뿐 아니라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샬 아즈나부르( Charles Aznavour)
Photograph: Paul Popper
2018년 10월 1일에 94세로 타계한 샬 아즈나부르씨는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과 사랑받는 가수, 송라이터이자 배우였다.
그는 프랑스의 샹송가수로 유명한 에디트 피아프의 권유로 노래를 하기 시작해서
비록 작은 체구에도(160 cm의 키) 불구하고 그의 대단한 재능은 곧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는 가수로 활동하면서 작곡가와 송라이터로도 재능을 발휘했고,
영화 'Tirez sur le Pianiste (Shoot the Piano Player)'의
주연배우로도 활동한 대단한 엔터테이너였다.
그는 '남자 에디트 피아프'라고 불리우기도 했고,
'프랑스의 프랭크 시나트라'라는 닉넴을 가질 정도로
샹송과 노스탈직 팝송을 그의 특유한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즈나부르씨의 아버지 미샤와 어머니 크나르는 아르메니아 출신인데
터키가 아르메니아인들을 대학살을 시작하자 프랑스로 피난을 온 난민으로
파리의 라틴 쿼터의 가난한 동네에 정착해서
쿡으로 그리고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다.
샬 아즈나부르씨는 바로 라틴 쿼터에서 1924년 5월 22일에
샤누르 아즈나부리안(Shahnour Varinag Aznavourian)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미샤는 파트타임으로 가수로 활동했고,
그의 어머니는 배우로 활동했다.
1957년에 방영된 영화 '파리 뮤직 홀'에서 출연한 아즈나부르씨
Photograph: Ullstein Bild
부모의 권유로 그는 춤도 배우고, 바이올린 연주, 노래와 연기 연습을 두루두루 했다.
1930년대에 그는 영화의 엑스트라로 출연하기 시작해서
1941년에 쟝 다스테 극단에 입단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샬 아즈나부르로 개명을 한 후에
싱어-작곡가인 피에르 로쉐(Pierre Roche)와 함께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도 부르고 작사자로 활동했다
종전 후에 그들은 피아프와 함께 프랑스와 미국을 성공적으로 순회공연을 하다가
로쉐가 결혼을 하면서 그룹이 해체되었다.
1950년대에 아즈나부르씨는 피아프, 베코(Bécaud)와 줄리엣 그레코 등
다른 가수들을 위해서 다수의 곡을 작곡했으며,
1960년대 초반에는 뉴욕의 카네기 홀 객석이 매진될 정도로
그의 공연은 큰 주목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다수의 영화에 출연해서 배우로서도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기도 했다:
Les Dragueurs (양심없는 젊은이:Young Have No Morals, 1959)
La Tête Contre les Murs (The Keepers, 1959).
d’Orphée (오르페우스:Testament of Orpheus, 1960),
Shoot the Piano Player(피아니스트 저격, 1960),
Candy (1968)
And Then There Were None (1974),
The Tin Drum (1979).
1987년에 파리의 리도 카바레에서 라이자 미넬리가 샬 아즈나부르씨를 무대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Photograph: Laurent Rebours
부모님의 고향인 아르메니아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그는
2002년에 아톰 에교얀씨 감독이 아르메니아인들의 대학살을 주제로 제작한
영화 'Ararat' 에 출연하기도 했고,
1988년에 아르메니아에 발생한 지진으로 20,000여명이 사망하고
큰 피해를 입게 되자 Aznavour for Armenia(아르메니아를 위한 아즈나부르)
자선단체를 설립하고,
아울러 Pour 'Toi Arménie' 노래를 작곡해서
프랑스의 주요가수들이 대거 참가해서 노래를 불러서
지진 피해자들과 복구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2004년에는 '아르메니아의 영웅'으로 선정되었고,
수도인 예레반에 아즈나부르 박물관도 개관했다.
그는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유네스코 대사와
2009년에는 스위스 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8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가수와 송라이터로 활약하면서
그는 1,200여개의 곡을 작곡했으며,
1억 8천개의 레코드가 팔렸고,
60여개의 영화에 출연했다.
유족으로 1967년에 결혼한 세번째 아내 우야(Ulla),
여섯명의 자녀가 있다.
국가장으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서...
파리에서 거행된 아즈나부르의 장례식 행사중에
유족과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부부가 유족과 함께
그의 관을 따라 가고 있다.
Photograph: EPA
프랑스는 프랑스의 20세기의 최고의 연예인이자
국민들이 오랫동안 사랑해 온 샬 아즈나부르씨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서
마크롱 대통령등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장으로 치루어졌다.
그가 작곡, 작사하고 직접 부른 수많은 노래는
수십년간 프랑스 특유의 샹송과 팝송을 대표하게 되면서
전세계에 에디트 피아프와 더불어 프랑스 샹송을 널리 알리게 했다.
Esplanades des Invalides 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에
그의 삶과 업적이 상영되는 것을 보는 파리 시민들
Photograph: Lucas Barioulet
나폴레옹이 묻힌 파리의 Les Invalides military complex(상이군인 콤플렉스)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서 마크롱 대통력은 아즈나부르씨가 작사한 가사는
" '우리의 비밀스러운 연약함'에 어필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위안을 주었고,
우리의 삶을 더 달콤하게, 슬픔을 덜어 주었다"
그리고 아즈나부르씨를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어에 비유하면서
"프랑스에서는 시인들은 죽지않고 영원하다." 라고 고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크롱 대통령은 아즈나부르씨를
이민자들이나 난민들의 자녀들이 그들이 새로 정착한 나라에
얼마나 큰 변화와 업적을 남길 수 있는 좋은 예라고 덧붙였다.
프랑스 전 대통령 사르코지(왼편)와 올랑드와 사르코지의 아내 칼라 브루니씨가
장례식에 참석해서 조의를 표하고 있다.
Photograph: Christophe Ena
오토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아르메니언인들이 대학살이 만행되자
프랑스에 난민 자격으로 프랑스에 정착한 아즈나부르씨의 부모 사이에 태어난 그는
아홉살에 학교를 그만 두고 아역 배우로 시작했다.
2차 대전 중 나찌 치하에 놓였을 때에 그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며,
그의 부모는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러시아인과 공산주의자들을
그들의 아파트에서 숨겨 주면서 2차대전 시기를 보냈다.
샬 아즈나부르씨의 관 앞에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서 있다.
Photograph: Yoan Valat
그의 장례식에 현 프랑스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은 물론
아르메니아의 수상인 니콜 파쉬니안씨도
아르메니안 인들의 영웅이자 자랑이라면서 그를 추모했다.
프랑스와 아르메니아 두 국가의 국민들의 추앙을 오랫동안 받아 온
그의 삶을 대변하듯이 그의 관은 프랑스 국기와
아르메니아 국기의 색상으로 화환으로 덮였다.
장례식은 큰 사랑을 받았던 그의 노래
Emmenez-Moi (Take Me Along) 가 연주되면서 끝을 맺었다.
그의 장례식을 거리에서 지켜 보는 파리 시민들
Photograph: Lucas Barioulet
프랑스 시인인 쟝 콕토씨는
"아즈나부르씨가 큰 성공을 한 이유는
그의 목청이 아니라
심장에서 우러나온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라고 평을 했다.
샬 아즈나부르씨가 불렀던 수많은 곡중에서 일곱 곡을 오랜만에 감상해 봅니다.
Les deux guita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