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770년 12월 16일에 태어난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로
원래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내가 활동하고 있는 합창단을 비롯해서
전 세계의 유수한 오케스트라와 실내악단, 합창단등 많은 연주가들과 성악가들이
그의 작품을 연주하기로 예정되었다.
하지만 코비드-19 사태로 12월에 공연된 예정이던 9번 "합창" 교향곡을 비롯해서
많은 공연이 취소되어서, 개인적으로도 무척 안타깝고 아쉽기만 하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이해서, 베토벤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진 한 여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뉴욕 모건 도서관 & 박물관은 베토벤이 작곡한 "해머클라비어" 피아노 소나타의 원본 악보의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
이 원본 악보의 가장자리에는 악보 출판사 사장인 빈센트 노벨로/Vincent Novello 씨가
"이 악보는 베토벤의 가장 오래되고 절친한 친구인 슈트라이커 여사로부터 받았다" 라고 쓴 글이 남아 있다.
나네터 슈트라이커의 이름과 명성은 이 몇 줄의 글에만 남고, 그녀의 명성은 역사에서 소외되고 잊혀졌다.
그녀는 12월 16일(혹은 17일)에 250살을 맞는 베토벤의 가장 측근이며 친구로,
당시 유럽에서 최상의 피아노 제작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녀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피아노를 제작하는 회사의 오너이자
직접 피아노를 제작한 인물로 피아노계에서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그녀는 피아니스이자 피아노 선생인 남편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Andreas Stericher 씨를
회사 직원으로 고용해서 피아노 판매, 장부 정리와 잡무 일을 맡겼다.
다수의 베토벤과 베토벤의 음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18세기에 여성이 직접 피아노를 제작할 뿐 아니라, 일 년에 50-65대의 그랜드 피아노를 제작해서
당시 최고의 피아니스트, 작곡가와 상류층 손님들이 소장하고 싶은 피아노를 제작하는 회사를 경영하는 것은
19-20세기에도 드문 케이스일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대단한 업적을 남긴 여성이라고 입을 모았다.
나네터 슈트라이커는 1769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피아노 안의 해머가 현/strings를
때리는 메커니즘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비엔나 액션" 방식으로 수준 높은 피아노를 제작하는
아버지 요한 안드레아스 슈타인/Johann Andreas Stein 씨의 여섯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녀가 여덟 살 때에 모차르트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했는데
모차르트가 그녀의 자세와 얼굴 표정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피아노 연주만큼은 대단한 신동이라고 극찬을 했다고 한다.
2년 후, 그녀가 10살 되던 해에 이미 그녀의 아버지의 피아노 제작 기술을 터득해서
연주가로서만이 아니라 피아노의 메커니즘과 제작에도 신동이라고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았다.
1792년에 그녀가 결혼한 지 얼마 후 그녀의 아버지가 작고하자
아버지가 제작한 피아노를 뗏목으로 운반해서, 비엔나에서 피아노 사업체를 설립했다.
그녀는 당시 16살 된 남동생 마테우스를 동업자로 참가시키고
회사 이름을 J. A. Stein에서 Geschwister(동기) Stiein 이름으로 변경했다.
당시 피아노는 급격한 발전을 한 시기였으며,
공연은 상류층의 살롱이나 왕족의 궁전 개인 음악홀에서 거대한 공연홀로 이동하던 시기로
피아노 제작사들은 규모도 크고, 무겁고, 공명이 큰 악기를 제작해야 하는
필요성에 부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Credit: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베토벤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이미 만난 적이 있는 나넷에게 1796년에 프레스부르크에서
예정된 피아노 연주회에서 사용할 피아노를 빌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당시 슈타인 회사가 제작한 우아하고 자태가 고운 피아노는 가벼운 터치와 부드러운 톤을 지닌 악기였는데
베토벤의 야생마처럼 격동적인 베토벤의 연주 스타일과는 잘 맞지 않았다.
나네터의 남편 안드레아스 씨는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의 에세이에서
"복수에 눈이 멀어서 악랄한 살인자처럼 피아노를 다루었다."라고 베토벤의 연주를 평했다.
그리고 "이미 내리친 첫 번째 코드가 너무 폭력적인 나머지, 연주자가 귀머거리인지 착각할 정도이다."
라고도 썼는데, 불행하게도 그의 선견지명은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
베토벤 자신도 그의 청력에 이상이 생긴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지만,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의 악화된 청력을 만회할 수 있는 공명이 큰 악기가 필요했지만,
초반에는 그의 연주 스타일과 작품의 강 약의 대조를 극대화할 수 있는 악기에 목말라했다.
나네터는 이미 피아노의 음역을 5 옥타브에서 6 1/2 옥타브로 음역이 늘어난 피아노를 제작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디자인한 피아노는 당시 연주자나 작곡가의 요구 조건에 맞추는 작업에는 뒤처졌다.
1802년에 그녀는 두 어린 자녀의 어머니가 되었고, 당시 6살 된 아들이 사망하는 등
여러모로 힘든 시기에 처해졌다.
설상가상으로 남동생과도 의견 충돌이 생겨서, 두 남매는 회사를 처분하고,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했다.
마테우스는 도시의 신문에 자신이 슈타인 피아노 회사의 정식 후계자이라고 주장과 함께
슈타인 피아노 회사 광고를 올렸다. 나네트는 남동생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슈트라이허 née 슈타인/Streicher née Stein 피아노 제작사를 창립했다.
(née 슈타인은 여성이 결혼 전 성을 쓸 때에 사용한다.)
하지만, 그녀는 남동생만이 아니라 Anton Walter 등 비엔나 피아노 회사와
프랑스와 영국의 유명한 피아노 회사들과도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1803년에 베토벤은 프랑스 Erard 피아노를 구입해서 사용하고 있었지만,
슈트라이커에게 그의 야심 찬 작품에 걸맞은 더 좋은 피아노를 제작하라고 지속적으로 종용했다.
나네터는 이런 외압적인 상황에 부응할 수 있는 피아노 개발을 위해서
그녀의 아버지가 디자인한 피아노를 여러모로 개선을 한 덕분에
1809년에 그녀는 기존의 피아노보다 비엔나에서 가장 사이즈도 크고, 제일 견고하고,
가장 큰 공명을 울리는 피아노 개발에 성공했다.
그래서 매년 50-65대의 이 개선된 그랜드 피아노를 제작하게 되었고,
그녀의 슈트라이허 피아노 회사는 비엔나에서 최고의 피아노 제작회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슈트라이허 피아노사가 비엔나에서 최고의 피아노 회사로 우뚝 서게 되면서,
1812년에는 그들이 제작한 피아노를 선 보일 수 있는 공연홀을 그들의 전시장 바로 옆에 지었다.
300석을 자랑하는 이 공연홀 벽에는 프란츠 클라인이 실제 얼굴 마스크를 토대로 만든
베토벤의 흉상을 비롯해서,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의 흉상들로 꾸며졌다.
이 공연홀에서 베토벤과 남편인 안드레아스의 제자들의 리사이틀을 비롯해서
루돌프 왕 등 귀족들의 피아노 연주회가 열려서, 당시 비엔나의 음악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최고의 피아노 제작에 정진하던 나네터는 1817년 8월부터
베토벤의 무질서하고 엉망인 살림을 주관해 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일생 내내 녹녹지 않은 삶을 산 베토벤에게도 아주 힘든 시기로,
그는 점점 청력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작곡 활동도 부진했고,
설상가상으로 형수로부터 조카를 어렵사리 데려오게 되면서,
조카를 위해서라도 정상적인 가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때였다.
그 후, 18개월 동안 베토벤은 나네터에게 60여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옷 세탁, 양말 수선, 구두 광내기, 그리고 식재료 구매를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당시 베토벤은 점점 망상증이 심해져서, "엉큼한" 하인들이 그의 집기들을 훔치고,
심지어 음식에 독을 탄다고 불안해하고, 이들은 "양심 없는" 형수와 공모해서
자신을 해친다고 믿고 있었다.
Credit: Fine Art Images/Heritage Images
베토벤은 일생동안 여성과의 관계가 어렵고 원만하지 못했다.
그는 그처럼 평민들과 절대 혼인을 허락해 주지 않을 귀족가의 아름다운 여인들과
자주 사랑에 빠지거나, 자식이 딸린 유부녀들에게 측은지심으로 정을 주는 것에 그쳤다.
나네터는 평범하고 매의 눈과 각이 진 얼굴로 미인과는 거리가 있었고
상류층의 신분도 없는 여성이었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너그럽고 후한 성격의 여성으로
베토벤은 그녀를 그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베토벤과 나네터의 관계는 베토벤의 일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여성과의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나네트도 그의 많은 단점들을 때로는 견디지 못하고,
출판사 사장인 빈센트 노벨로에게 베토벤은 "탐욕스럽고 불신에 그득 차 있다."라고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베토벤과 나네터는 어느덧 20여 년 지기 친구였으며,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고, 궁극적으로 둘 다 피아노에 대한 열정으로 통하는 데가 있었다.
나네터가 베토벤의 잡다한 집안일을 맡게 되면서,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테크닉상으로도 가장 난이도가 높고, 소나타 후반에는 더 난이도가 높은 fugue 형식이 포함되고,
길이도 긴 야심작인 "Hammerklavier/해머클라비어" 소나타 작곡 작업 착수에 들어갔다.
이를 시작으로, 베토벤의 걸작인 "Missa Solemnis/장엄 미사", 디아벨리 변주/"Diabelli" Variations와
9번 교향곡이 이 시기에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에서 제작된 피아노를 사용하던 베토벤은
나네터에게 쓴 편지에 1809년 후에 제작된 슈트라이허 피아노를 제일 선호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나네터는 베토벤보다 5년 후인 1833년에 64세로 타계했지만,
그녀가 설립한 슈트라이허 피아노 회사는 그녀의 아들 요한 밥티스터,
그리고 그녀의 손자 에밀이 물려받아서 회사의 명성을 잘 유지했다.
특히 에밀은 브람스를 위해서 피아노를 제작하기도 한 인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에밀이 1896년에 은퇴하면서, 슈트라이허 피아노 회사도 문을 닫게 되었다.
1816년에 제작된 나네터 슈트라이허 피아노를
마가렛 후드씨가 그대로 복제 작업을 시작해서
앤 애커씨가 완성한 피아노
비록 그녀가 시작한 피아노 회사는 사라졌지만, 그녀가 만든 다수의 악기들은전 세계의 유수한 박물관에서
그리고, 그녀의 업적에 감화받은 재능 있는 여성들의 손에서 여전히 명성과 유산은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1960년대에 서예가 겸 아티스트인 마가렛 후드 씨가 취미로 피아노의 전신인 합시코드를 수제로 만들기 시작했다.
확실한 고증을 위해서 유럽에서 자료를 찾다가, 결국 위스콘신 주 플래빌에 소재한 워크숍에서
2008년에 작고할 때까지 1816년에 제작된 6 1/2 옥타브의 슈트라이허 복제 피아노를 생산하게 되었다.
피아노 연주 전공을 하다가 수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게 된 앤 애커/Anne Acker 씨가
우연히 위스콘신에서 후드 여사를 만나면서, 서로 음악을 사랑하는 공통적인 이유로 친해지게 되었다.
얼마 후 앤은 후드 여사와 함께 합시코드와 앤티크 피아노 수리를 함께 하게 되었고,
후드 여사가 작고한 후 앤은 후드 여사의 남편으로부터 슈트라이허 복제 피아노 회사를 넘겨받았다.
특히 "나는 한 여성이 오랜 연구 끝에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피아노를
또 다른 한 여성이 다시 찾아내서 복제 피아노를 만들기 시작한 것을
한 여성에 의해서 완성을 하고 싶다."라고 어필하면서 회사를 인수했다고 한다.
이렇게 2세기에 걸쳐서 세 여성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대단한 피아노는
2019년에 보스턴에서 개최된 Early Music 페스티벌에서 데뷔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9년은 바로 나네터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Beethoven Sonata N° 29 'Hammerklavier' Daniel Barenboim
Hammerklavier sonata, opus 106 (1819)/함머클라비에 소나타
이 소나타는 베토벤이 작곡한 29번째 소나타로,
작곡된 후에도 너무도 연주하기에 어려워서 수년간 아무도 이 소나타 연주를 시도하지 않다가
1836년에 유명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당시 수퍼스타였던 프란츠 리스트가
파리의 Salle Erard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그 후에도 재능있는 피아니스트라도 쉽게 다가가지 않을 정도로 테크닉면으로
너무도 어려웠는데, 심지어 영국의 악보 출판사는 연주하기에 힘들다고 판단해서
4 악장 중 제일 어려운 4악장은 빼고, 3악장만 출판할 정도였다.
나네터가 제작한 중후하고 소리가 큰 피아노와
그녀의 따스한 보살핌 덕분에 다시 작곡 작업에 충실하게 된 베토벤이
작곡한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를 피아니스트 대니얼 베렌보임의 연주로 감상해 보면서
다음주에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고 나와 생일이 같은 베토벤의 삶을 기념하고
그가 남긴 주옥같은 작품과 이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에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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