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트의 성 바보 대성당/St. Bavo's Cathedral
(2019년 6월 14일)
성 바보 성당 광장에서 바라다본 성 바보 대성당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기차를 타고 벨지움(벨기에)의 서북쪽에 위치한 Ghent/겐트로 이동했다.
벨지움은 독일, 프랑스와 네덜란드 세 나라에 둘려 쌓인 자그마한 나라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언어까지 이 세 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유럽에서 네덜란드 다음으로 두번 째로 인구 밀도가 높은 국가이다.
면적은 작지만, 다양한 배경의 벨지움은 남쪽에 위치한 왈로니아/Wallonia는 불어,
북쪽에 위치한 플란더스/Flanders는 플레미쉬/Flemish라고 불리는
더치/Dutch(네덜란드 어)를 사용하며,
수도인 브럿셀에서는 두 언어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벨지움은 경제저거으로나 정치적으로 주요한 관계로 25% 이상의 주민이
타국 출신이라서 영어가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영어로는 벨지움으로 불리는데, 불어로는 벨지크/Belgique,
더치어로는 벨기에/België 로 불린다.
벨지움에서 가장 큰 도시는 인구 50만 명의 앤트워프이며,
헨트/겐트는 26만 명의 인구도 두 번째로 크며, 브루헤/브루지는 13만 명,
그리고 수도인 브러셀은 17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겐트에 숙소를 정한 이유는,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브루헤/브루지,
안트워프와 브럿셀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어서 숙소를 도시마다 옮기기보다는
기차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겐트에서 기차로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오후 2시경에 두 달 전에 예약해 둔 아파트 형식의 숙소에 도착했다.
리모델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지, 내부가 깔끔하고 가전도구와 가구가 다 새 것이었고,
간단한 부엌 시설과, 식기 등이 제대로 구비되어서, 간단하게 요리도 할 수 있게 구비가 되어서
일단 숙소가 퍽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었다.
소파와 옷장
침대와 TV
짐을 풀고, 간단히 요기도 하고, 간단히 짐을 챙겨 매고, 겐트 구경에 나섰다.
한 때 성 요한 교회 건물은 지금 성 요한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다.
겐트라고 흔히 불리는 이 도시는 더치로는 헨트, 불어로는 강이라고 불리며,
동 플란더스의 수도이며 면적으로는 브럿셀과 안트워프 다음으로 크다.
650년 경에 성 아만드가 성 베드로 수도원과 성 바보 수도원을 창설했으며,
800년경에 샬레망의 아들인 루이가 아인하트/Einhard를 두 수도원의 원장으로 보냈다.
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서서히 도시가 성장해 나가다가 851년과 879년에
바이킹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겐트는 11세기부터 바이킹의 피해를 극복하고 발전을 거듭해서 도시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13세기부터는 겐트는 알프스산 북쪽의 전 유럽에서 파리 다음으로 큰 도시로 급부상했다.
도시 내에 6만 5천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유서 깊은 성 바보 성당과 성 니콜라스 성당의
종탑과 화려한 성당 내부가 당시의 도시의 위상을 대변해 주고 있다.
겐트 주위에 흐르는 강들은 주기적으로 범람해서 생겨난 늪 지역에서 서식하는 풀 덕분에
양을 기르는데 아주 적합해서 양털로 만든 직물산업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중세기에 겐트는 직물산업을 주도하는 도시로 부상했고,
가까운 곳에 위치한 브루지에서 시작된 모직 산업은 유럽에서 최초로 겐트에서
모직 산업지구가 생겨났으며, 직물산업이 너무도 활발한 나머지 스콧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양털을 수입해서 모직 수요를 조달할 정도였다.
이런 관계 덕분에 플란더스 지역은 오랫동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Vrijdagmarkt Square/브라이다흐막트 광장(금요일 시장 광장)
이 광장은 평범한 시민의 겐트라는 것을 보여주는 시장 광장으로
일주일에 서너 번씩 열리는 곳이다.
광장의 이름 브라이다흐는 더치로 금요일이라는 뜻처럼
오랫동안 금요일에 장이 서다가
근래에 들어서는 일요일에 앤틱과 헌책 등을 파는 가장 큰 장이 서고,
금요일과 토요일엔 규모가 작은 장이 들어서는 곳이다.
브라이다흐 광장에 위치한 성 제임스 성당/St. Jacob's Church
겐트는 중세기에 모직 산업과 무역 덕분에 부유해졌으며,
14세기의 유럽의 대부분이 농촌이었을 당시
인구가 6만 5천에 달해서 알프스 산맥 북부 유럽에서
파리 다음으로 큰 도시로 성장했다.
주민의 2/3가 직물 산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유럽에서 최초로 산업도시로 자리 잡았다.
겐트는 1500년경에 가장 정점을 찍었으며,
당시 최신 유행의 옷과 천을 짜서 전 유럽에 수출했다.
이렇게 쌓은 부를 토대로, 대부분의 타 도시에
"대 시장/Grote Markt)이 하나씩 위치한 것과 달리
품목별로 각각 다른 시장이 도시 군데군데 다수 존재했다.
광장에 들어선 평균 300년이 넘는 오래된 건물들은
각각 특이한 디자인의 gable/박공이 아주 인상적이다.
벨지움이지만, 네덜란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물들을 봐도
비록 국가는 달라도, 언어와 역사 그리고 문화가 네덜란드와 밀접한 것을 볼 수 있다.
브라이다흐 광장에 Jakob van Artevelde/야콥 반 아르테벨데의 동상이 들어서 있다.
반 아르테벨데 씨는 14세기에 살았던 현명한 비지니스맨으로
겐트가 도시를 지배하던 프랑스와 양모를 공급해 주는 영국 두 강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서,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에
평민 출신이었지만, 두 나라의 왕들과 직접 협상을 벌려서
겐트를 중립 도시로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양모를 조달할 있게 조치해서
겐트를 난황에서 구해냈다.
그의 대단한 업적은 19-20세기에 들어와서 재인식되면서
프랑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독립성을 구축한 그를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고,
겐트의 시민들은 이 도시를 'Artevelde-Stad/아르테벨데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Belfortstr./벨포르트 거리
겐트 시청/Stadhuis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부분은 16세기 초반에 지어졌고(왼편),
네오클래식 양식은 17세기에 추가되었다.
정교하게 조각되고 고딕 양식으로 16세기 초반에 지어진 시청 건물
시청 건물과 종탑
Belfry/종탑
이 종탑은 14세기에 플란더스의 백작들의 요청에 의해서
겐트의 상류층의 중요한 기록이 담긴 양피지 사본들과
서류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지어졌다.
종탑 꼭대기에는 용이 자리 잡고 있는데
중세기에 용은 흔히 악마를 상징했지만,
겐트의 이 용은 잠을 자지 않고 늘 깨어서 온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도시의 권익과 자유를 보호하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Biezekapel/비제 거리
오래되고 좁은 골목에서 드디어 겐트가 자랑하는 성 바보 대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성 바보 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대성당으로
유명한 반 아이크작의 '겐트 제대 피스'/Ghent Altarpiece 작품을
소장한 곳으로 잘 알려졌다.
성당 문을 들어서자 보인 제대의 모습
마침 카메라의 배터리가 다 소모되어서 충전이 되는 동안
부득이하게 여기부터 화상도가 낮은 셀폰으로 사진을 담았다.
Adam and Eve with Clothes/옷을 입은 아담과 이브
by Jan van Eyck (c.1390 – 9 July 1441)
이 그림은 겐트 알타피스의 두 패널 작품의 복제품으로
19세기의 청교도적인 사상으로 원래의 벌거벗은 두 사람에게 옷을 그려 넣었다.
옷을 입힌 이유는 그들이 나체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흥미롭게도 아담의 털로 덮인 다리와 이브의 불룩한 배가
너무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 뒤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
성 바보 대성당/Sint Baafskathedraal 은 89미터의 높이의 대성당으로
겐트 교구의 주교좌성당이다.
오리지널 성당은 942년에 목조로 축성되었다가,
1274년에 고딕 양식의 성당 건축이 시작되어서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건축공사가 진행되었다.
1539년에 이 성당에서 영세를 받은 스페인의 국왕 찰스(칼로스) 5세에 대항하는
폭동이 발생해서 원래의 성 바보 수도원의 문을 닫게 되었고,
수도원장과 수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성 바보 성당을 발족했다.
1559년에 겐트 교구가 생기면서, 이 성당은 주교좌 대성당으로 승격했으며,
성당 건축 공사는 1569년 6월 7일에 정식으로 마무리되었다.
1566년 여름에 네덜란드에서 아 도시로 건너온 캘비니스트들이
그들 생각에 우상숭배로 간주되는 성당 내의 조각상, 그림 작품 그리고
스테인드 글라스를 파손시킨 사건이 발생했는데
다행히도 반 아이크의 알터피스는 파손을 면했다.
십자가의 길 14처 그림들
십자가의 길 14처 그림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고상
로코코 양식으로 제작된 제대의 모습
한 그룹이 투어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어서
우리도 옆에 끼어 서서 열심히 엿들었다.
복구된 종교개혁 당시에 파손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Pater Damiaan/다미안 신부(1840-1889)
다미안 신부는 플레미쉬 선교사로 하와이에 파견되어서
문둥병(한센씨 병) 환자들을 16년간 돌보다가
그 역시 문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9년에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다미안 신부님의 뒤의 현대적인 스테인드 글라스
성 프란체스코
로코코 양식의 강론단
이 강론단은 하얀 돌과 나무를 조각해서 만든 것으로 생명의 나무와
지혜의 나무를 묘사하고 있다.
카라라 대리석으로 제작된 가운데 보이는 작품은
오른편에 가슴에 태양(신앙의 힘을 상징)을 품고있는 여인은
왼편에 있는 날개 달린 노인(시간을 상징)을 깨우고 있다.
이는 '캐톨릭 신앙을 깨워야 할 시간이 왔다'라는 종교개혁에 대응하는
반종교 개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강론단 꼭대기에는 황금 뱀과
그리고 그 뱀 입에서 금단의 사과를 한 아기가 빼내려고 하고,
그 아래에는 두 큐피드가 십자가를 힘들게 받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