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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s Scrapbook/좋아하는 영시

[전쟁 영시 감상 164] "We Lived Happily During the War" by Ilya Kaminsky/카민스키 작의 "우리는 전쟁 중에도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by Helen of Troy 2022. 3. 15.

 

Illustration by R. O. Blechman

 

 

We Lived Happily During the War

전쟁 중에도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by Ilya Kaminsky/일랴 카민스키

 

 

And when they bombed other people’s houses, we


protested
but not enough, we opposed them but not

 

enough. I was
in my bed, around my bed America

 

was falling: invisible house by invisible house by invisible house —


I took a chair outside and watched the sun.


In the sixth month
of a disastrous reign in the house of money

in the street of money in the city of money in the country of money,
our great country of money, we (forgive us)

 

lived happily during the war.

 

 

 

한글 번역: Nancy Helen Kim

(한글 번역은 잠시 후 내립니다.)

 

 

 

이 시는 그의 시집 '귀머거리 공화국' 시집에 포함된 것으로 

아주 평범하고 심플한 말로 전쟁 중에 타의든 자의든 전쟁의 공범자들을 주제로 쓴 작품이다.

전쟁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와중에도 행복하고 편한 삶을 영위하는 해설자를 통해서

전형적이고 관습적으로 쓰인 정치적인 시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 작품은 평범하게 1인칭 복수 we로 시작해서 1인칭 단수 I로 바뀌었다가

(forgive us) 부분에서 복수형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이 대명사는

약간의 제스처로 용서를 구하는 우리 모두가 결국은 공범자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Ilya Kaminsky/일랴 카민스키(1977년 4월 18일생)씨는

소련연방에 속했던 우크라이나의 오데싸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서 시인, 비평가, 통역/번역가이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국(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싸에서 유태계 집 안에 태어났다.

안타깝게도 네 살 때에 유행성 이하선염을 앓은 후유증으로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자가 되었다.

 

그는 10대부터 러시아어로 시를 쓰기 시작해서 '축복받은 도시'라는 시집을 출판했다.

그와 가족은 우크라이나 내에서 유태인들에 대한 적대감과 차별로 심해지자

1993년 정치적인 망명을 요청해서 미국의 로체스터에 정착하게 되었고,

놀랍게도 바로 이듬해인 1994년부터 영어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카민스키 씨는 그의 제2 언어인 영어로 'Dancing in Odessa (2004)'/오데싸에서 춤추기'와

'Deaf Republic (2019)'/귀머거리 공화국'  두 시집으로 시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비영어권 국가에서 쓰인 작품들을 영어로 번역해서 미국에서 출판을 추진해서

널리 소개한 작업에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해왔으며,

'국경 없는 언어' 잡지와 'Poetry Internation"의 시 부분 편집자로 오랫동안 일을 했다.

 

아울러 세계 여러 나라에서 쓰인 시를 모아서 다수의 앤솔로지 책을 편찬하고 출판해서

많은 국가의 학교에서 사용되게 한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는 이라크, 중국, 동유럽권 국가, 남미 등 다양한 국가에서 쓰인

시들을 전집으로 출판하는 등 다양한 배경과 언어로 쓰인 시들을 

원래 언어와 영어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현재 그는 애틀란타에 거주하면서

조지아 공대의 'Bourne Chair in Poetry' 시인으로 선정되어서 활발하고 활동하고 있다.

 

 

 

 

 

 

 

by Zhenya Oliinyk

 

 

아래 글은 3월 13일 자 뉴욕 타임스에  일랴 카민스키 씨가 기고한 글입니다.

 

전쟁이 시작한 지 2주가 지났지만, 러시아 군대는 내가 태어난 고향인

우크라이나 남서부에 흑해변에 위치한 오데싸를 여전히 폭격을 가하고 있다.

 

나는 군인들이 민간들을 무차별하게 총을 겨누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기도 싫지만,

내 머릿속 어디엔가는 1984년 오데사의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면서 

이 상상하기 힘든 장면을  farce/소극(笑劇)으로 변경시켜준다.


당시 나는 일곱 살 귀머거리 소년으로 정부 소유의 옥수수밭을 달리고 있었으며,

한 경찰관이 팔을 흔들며 내 뒤를 바짝 쫓아왔고,

60대의 내 할머니는 내 앞에서 안간힘으로 빠르게 달렸다.

할머니와 나는 정부 소유 밭에서 옥수수를 훔치고 있었는데, 다행히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옥수수만 훔치지 않았다.

어떤 날은 할머니는 나를 정부 소유의 자두나무 과수원으로 데리고 가서,

열매를 따기 위해서 나를 지붕 위로 올려 주시곤

제일 작 익은 자두를 많이 따라는 무언의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시곤 했다.

이렇게 훔친 자두로 할머니는 잼을 만드셨다.

한참 후에, 나는 러시아 시인 인나 카비시이 쓴 

"러시아에서 잼을 만들고 있는 사람은

희망이 보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시를 읽었다.

지금 나는 미국에 거주하면서 거의 매일 온라인에 들어가서 

우크라이나 출신 시인이나 번역/통역가들을 우크라이나에서 구출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다행히 다수의 문학 단체들이 기꺼이 이들을 난민 자격으로 받아들일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나와 할머니와 달리 이들은 모국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이들은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원하고 있고, 그들이 사는 동네에서

모국어(우크라이나어 & 러시아어)를 구사하고 싶어 한다.

나의 유태인 가족은 오데싸를 반복해서 떠났다가 다시 돌아갔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명령에 따라서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에 침공해서

나의 고향 오데싸를 폭격하기 시작한 날부터 전혀 예상치도 않게

내가 쓴  "전쟁 중에도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시가 

인터넷상에 빠르게 퍼지게 되었고

다수의 저널리스트들이 이 시를 설명해 달라는 이메일을 보냈다.

 

이 시는 2013년에 Poetry International에 발표되었는데,

그 해에 마이단 반정부 시위를 벌였는데,

당시 대통령이던 친 러시아 주의 빅터 야누코비치 씨가 이 시위를 강제로 진압했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몰아내자,

푸틴은 기다렸다는 듯이 크리미아 반도를 장악했고, 돈바스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나는 이 시를 “We lived happily during the war,”

“and when they bombed other people’s houses,

we / protested / but not enough,

we opposed them but not / enough.” 이렇게 시작했는데,

내가 택한 제2의 고향인 미국에서도 비슷한 "자유" 캠페인을 벌리고 있었다.

 

현재 푸틴 대통령이 시작한 키이브 폭격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결정으로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폭격하는 사건은

과연 어떻게 다를까?

두 침공 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허위적인 명목으로 폭격을 단행했다:

부시 대통령 경우는 이라크에 존재하지 않은 대량학살을 벌릴 수 있는 무기 보유가 침공의 명목이었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언어와 문화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 세웠다.

 

그런데 오데싸는 지리적으로 러시아와 근접해서 

대부분의 시민들이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푸틴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민간인들을 향해서 폭탄을 퍼부으면서

러시아어를 "보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며칠 전에 오데싸에 사는 사촌 페티아가 "러시안 군대가 해변을 공습하고 있어.

누굴 겨냥하고 폭탄질일까?  이젠 바캉스 시즌이 사라졌어!!"라는 

오데싸 특유의 유모어가 담긴 이멜을 보내왔다.

참고로 4월 1일은 제일 중요한 명절이다.

 

나는 러시아 군대가 오데싸 만에 도착해서 무거운 무기와 장비를 등에 메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계단을 올라가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화염병과 돌을 던지면서 맞서고 있는 장면을 연상하게 된다.

나의 할아버지는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트랙터를 타고 맞섰다.

그래서 그런지 이 전쟁은 영화나 시에서 만날 법한 사건같이 느껴지지만,

안타깝게도 엄연한 현실이다.

오데싸는 두려움과 고통으로 떨고 있다.

시는 “And when they bombed other people’s houses,” 로 이어진다.

과연 지금 누가 체치니아의 수도인 그로즈니 폭격으로 파괴된 사건을 기억할까요?

미국과 서방의 정치인들은 잠시 비난의 소리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러다가 곧 잊었다.  간편한 망각은 이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오일 회사들은 푸틴과 비지네스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In the street of money in the city of money in the country of money,”

“our great country of money.”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1일에 줌(Zoom) 시 낭독을 하기 위해서

미국과 우크라이나 출신 시인 800여 명이 온라인상으로 모였는데

이는 내가 참가한 행사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 시 낭독 이벤트였다.

그렇다면 이 환난 중에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시 작품에 매달릴까?

우리가 함께 시 낭독을 하는 동안 60km가 넘는 기다란 군대 호위대 행렬이

줄을 지어서 이동하면서 수도 키이브 북부를 위협하고 있었고,

서방 국가들은 그리 크지 않은 4천4백만의 인구를 가진

우크라이나의 젊은 민간인들이 우리나라를 지킬 사람은 남이 아니라

바로 우리뿐이었음을 자각하고 총을 차고, 모래주머니를 채우고,

화염병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친구가 "서방 국가들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마치 리얼리티 티비 방송을 보듯이

우리가 이 상황에서 죽을지 아니면 계속 살아남을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라는 글을 보내왔다. 

또 다른 친구는 "우리는 폭격기, 헬리콥터와 낙하산을 타고 내리는 공수부대원을

창문을 통해서 목격했다. 하지만 우리는 수십 킬로미터를 걸었다."라는 이멜을 보냈는데

다행히 그의 아내는 폴란드로 피난을 했고, 자신은 우크라이나에서 머물고 있다고 근황을 알렸다.

 

오데싸에 거주하는 한 친구는 "나는 팔랑카 도착한 약 10 km 길이로 줄어 서서 기다리는 피난민들을 보았고,

눈이 내리는 날에 500-600명의 엄마와 어린아이들이 걸어서 피난길에 오른 모습을 목격했다."라고 알려주었고,

또 다른 친구는 "사람들이 가게에 남은 어떤 음식이라도 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나는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림도 그리고, 큰 소리로 책을 읽고 있어."라는 이멜도 보냈다.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느냐는 말에

마지막으로 평생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나보다 연배가 많은 친구는 

"푸틴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왔다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도와주고 싶다면, 우리에게 시 작품과 수필 작품을 보내주세요.

그러면 우리가 편집해서 문학잡지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라고 대답했다.

 

이 참혹하고 무서운 전쟁 중에도 그는 시를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