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5분, 9시 45분 표가 매진되어서
11:45분 Liberty hydrofoil 쾌속정 페리에 올랐다.
19 Km 거리를 30분 안에 도착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르며 파비냐나로 향했다.
에가디 군도에서 가장 큰 파비냐나 섬
오후 12시 12분에 파비냐나 항구에 도착한 페리에서 내려서...
나비 모습을 띈 파비냐나 섬
"지중해의 나비"로 알려진 파비냐나 섬은
시칠리아의 에가디 군도에 속한 파비냐나섬, 마렛티모섬
그리고 레반초 섬 중에서 가장 큰 섬이며
넓이는 약 19 제곱 km이며,
해안선 길이는 약 32km에 달한다.
파비냐나 섬의 이름은 라틴어 favonius에서 파생되었으며,
이 단어는 고대 로마 제국 시대에 로마 서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의미한다.
파비냐나 섬 항구
고대에는 '염소섬'이라는 뜻의
애구스타/Aegusa/Αιγούσα로 불렸다.
지금의 이름은 고대 로마 시대에 서쪽에서 불어오는
덥고 건조한 푄 바람/foehn wind을 뜻하는
파비노/Favino 바람에서 파생되었다.
고대시대에 지중해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했던 페니키아인들이
기원전 241년 3월에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군대가
로마제국 해군에 패망할 때까지
파비냐나를 지중해 무역로의 중간 거점으로 삼았다.
고대 세계의 주요 해전으로 꼽히는
포에니 전쟁/punic은 파비냐나 섬 근처에서
카툴루스 제독이 이끄는 200척 규모의 로마 해군과
400척을 대동한 카르타고의 거대한 해군과 맞붙어서
로마군대가 120척의 카르타고 군함을 침몰시키고
만 명의 포로를 생포하면서 승리했다.
이 전쟁에서 전사한 카르타고와
페니키아 군인들이 워낙 많아서
파비냐나 섬 북쪽 해안이 피로 붉게 물들게 되어서
지금도 북쪽 해안은 붉은 만이라는 뜻인
Cala Rossa라고 불린다.
중세기에 이 섬은 아랍인들에게 장악되면서
시칠리아 섬 전체를 정복하는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사라센인들은 이 섬 제일 높은 산 꼭대기에
'산타 카타리나' 궁전을 지었으며,
후에 이곳을 장악한 노르만인들이
1081년에 요새로 다시 지었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제노아의 거상들과
스페인 출신 상인과 어부들이
이 섬을 지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 섬 부근에 거대한 참치 어장 때문이었다.
17세기까지 참치조업으로 큰 이득을 올린
스페인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재정난에 처해지면서
1637년에 제노아의 팔라비치노 후작에게 팔아넘겼다.
그는 산 자코모 요새 주위로 기반을 잡고
이 섬의 경제를 활성화시키다가
1874년에 이 섬을 포함한 에가디 군도를
이탈리라 본토의 갑부인 이냐치오 플로리오에게
2백75만 리라에 팔아넘겼다.
플로리오/Florio는 이 섬에 거대한 참치 통조림 공장에
투자했는데 이는 섬 경제 발전에 큰 이바지를 했다.
플로리오 가문은 당시 최첨단 기술로
참치 통조림 공장을 설립했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노동자들의 권리를
최초로 인정해 주었고,
주민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유치원도 설립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두 번의 큰 전쟁을 겪으면서
경제에 큰 타격을 입게 되자
많은 주민들이 본토로 이주를 했다.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참치 산업은
1980년대까지 지속되다가
급격한 참치 수의 감소로 통조림 공장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1960년대부터
관광산업으로 호전으로
섬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항구에 갓 잡은 생선을 팔기도 하고
숯불에 구워 주기도 하는 어부 아저씨
길 건너에서 스탠드에 싱싱한 생선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항구 뒤에 파비냐나 섬에서 가장 높은
산 꼭대기에 1,000여 년에 지은 요새가 아직도 버티고 있다.
항구와 맞닿은 거리
배에서 내리자마자 자전거를 대여해 주는 가게들 직원들이
한꺼번에 다가와서 서로 자기 가게에서 자전거를 빌리라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마다하고
일단 걸어서 동네를 둘러보기로 했다.
Palazzo Florio/플로리오 궁전/빌라 플로리오
파비냐나의 보석이자 심벌인 플로리오 궁전의
외부는 네오고딕양식으로,
내부와 가구는 아르-누보 스타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이냐치오 플로리오가 1874년에
이 섬을 포함한 에가디 군도를 사면서,
팔레르모 출신 건축가이자 엔지니어인
쥬제페 다미아니 알메브다/Almevda에 의뢰해
1877년에 완공되었다.
플로리오 궁전 뒤 정원
이 궁전이 완공되자마자 이 건물은
특히 참치 조업 시즌 중에는
파비냐나 섬 사교계의 중심이 되었다.
정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항구와 산타안나 요새
1600년대에 지어진 메인 광장
파비냐나 시청 건물
그 앞에 세워진 Ignazio Florio Senior(1838-1891)
이냐치오 플로리오(아버지)의 동상
사막성 지중해 기후권에 속하는 시칠리아의
대부분 동네의 가게나 집들은
오후 1시부터 4-5시까지
날씨가 너무 더워서 시에스타에 들어간다.
원래 계획과 달리 파비냐나에 12시 15분에 도착하다 보니
나무 그늘 하나 제대로 없는 거리는
그야말로 뜨거운 태양으로 지글지글 타올랐고,
그래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시원한 해변가로 갔나 보다.
이런 기후적인 이유와
걸어서 섬 전체를 구경하기엔 시간도 제법 걸려서
대부분의 방문객들을 자전거를 빌려서 교통수단으로 이용한다.
열린 가게도 몇몇 있었지만,
한산하고 고즈넉하기만 하다.
그저 찬 음료수와 달달한 아이스크림이 땡기는 그런 날씨에
일찌감치 처진다.
Mother Church/원죄 없는 잉태의 성모마리아 성당
Chiesa Madre Maria SS. Immacolata
그늘진 곳이 없는 광장에서 뜨거운 햇빛을 피해서
일단 안타 안나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일단 밖과 달리 덥지 않았고
단 한 명의 신자가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어서
평화롭고 경건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성 안나 채플
성경 봉독대
성십자가 채플
원죄 없는 잉태의 성모 마리아를 모신
메인 제대
마돈나 상과 세례폰트
제대 왼편에도 세워진 마돈나 상
성당 외부 모습
성당을 나서니 그동안 거리는 더 뜨거워져 있다.
한산한 광장을 뒤로하고...
그나마 정오의 짧은 그늘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이 만나는 곳에 있는
살베 레지나/아베 마리아라는 글이 새겨진
자그마한 채플
주민들이나 방문개들이 오다가다
잠시나마 성모님께 기도를 올리기에 참 좋을 것 같다.
40도를 육박하는 더운 날씨에 걷는 것을 포기하고
시원한 바닷가로 가기 위해서
자전거를 빌렸다.
자전거 코스
일단 제일 가까운 해변이 있는 쪽으로 페달을 밟으면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골목을 구경해 보았다.
주택가를 지나서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 들어서...
잠시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으려고 pause..
제주도의 나지막한 돌담길이 연상되는 길이 아름답다.
목이 마르지만, 화장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확신이 없어서 아주 아껴가며 마셔야 하는 것이 좀 씁쓸하지만
달리는 기분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그늘 비스무리한 곳에서 잠시 쉬면서...
돌담길에서 만난 아름다운 집 하나
철문 안의 집이 궁금해 가까이 가서
안을 들여다 본 집 둘
집 셋
해안을 따라서 찻길을 따라서...
오래된 유적지를 보수해서 숙소로 쓰이는 건물도 지나고...
선인장과 shrub 만 보이는 건조하고 더운 길도 지나고...
드디어 첫 목적지인 칼라 로싸 해변이 저 앞에 보인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