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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Log/크로아티아·보스니아

[사라예보여행3]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남은 거리에서....

by Helen of Troy 2013. 7. 28.

 

사라예보 포위 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Holiday Inn in "Sniper Alley"

 

 

 

The Siege of Sarajevo(사랑예보 포위)

 

1992년 초반에 비록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보이코트에도 불구하고

64% 에 달하는 보스니아-헤르쩨고비타 국민들이 참가한 투표에서

투표자들중 98%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하는데 찬성표를 던졌다.

투표후 몇달간 보스니아내의 세르비아의 지도자 카라드지치와 보스니아 대통령인 이제트베고비치는

서로 보스니아의 미래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면서 서로의 군사력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이제베고비치 대통령은 수도인 사라예보 중심에

카라드지치는 사라예보 주위를 둘러싼 산에 병력을 배치했다.

 

1992년 4월 1일에 세르비아 군이들이 동부 보스니아의 작은 마을 Bijeljina(피옐리나)를 점령해서

선량한 주민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터졌고,

이어서 4월 5일에 사라예보 시민 100,000 명이 보스니아 국회건물 앞에서

평화적인 데모를 시작했고, 곧 국회안으로 몰려 가서

정부에게 시민들의 안전보장을 요구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국회에서 가까운 홀리데이 인에서 사태를 불안하게 주시하던 카라드지치는

저격병들에게 모인 군중들에게 총을 발포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6명이 사망하게 되자 그는 높다란 산으로 피신을 하고

보스니아 경찰은 사상자를 낸 저격병들을 체포하게 된다.

보스니아 대통령 이제트베고비치는 체포된 저격병을 석방하라는 카라드지치의 최후통첩을 불응하자

카라드지치는 사라예보를 폭탄세례를 퍼부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후로, 보스니아 전역에 세르비아 군인들은 보스니아 주민 대학살을 시작하게 되고,

5월 2일부터는 전면적인 폭격을 퍼부어서, 중앙우체국을 폭파해서 전화통신을 두절시킨 후에

사라예보 도시를 바리케이드로 시 전체를 외부와 완절 단절시키기에 이르렀다.

 

외부와 단절로 포위된 사라예보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경찰, 유고슬라비아에서 전향한 군인들, 거리의 갱들까지 동원되었는데

양쪽 다 장기전으로 돌입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밀로셰비치는

악명높은 믈라디치 장군을 보스니아로 배치하였다.

그는 이슬람 동네 주민들이 미칠때까지 쉬지않고 폭격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저격병들은 누구든지 거리를 걸어다니는 주민들을 총살하였다.

 

이렇게 참혹하고 어려운 포위상황에서도 다행히도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으로

사라예보 시민들은 살아 남을 수 있기도 했다.

시민들이 힘을 합쳐서 지하로 터널을 뚫어서 적십자 단체, 이슬람, 정교회 캐톨릭, 유대교 단체와

세계 각국에서 보낸 물자로 신 포위상태를 지탱 해 나갔다.

제일 필요한 주식은 UN에서 비행기로 수송해서 조달했고,

시민들은 필요한 물자나 서비스를 지불하지 못할 때는 서로 물물교환식으로 해결했을 뿐 아니라

제일 암울한 시기에도 미술 전시회고 열렸고, 카페에 모여서 담소도 나누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보스니아 필름 페스티발도 1993년에 시작되었다.

 

1995년 중반에 NATO 병력과 인접한 크로애시아 & 보스니아 연합군이 펼친

합동작전으로 포위가 느슨해지기 시작하면서,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한지 만 4주년이 되는 1996년 2월 29일에

정부는 포위가 정식으로 종료되었음을 선포했다.

 

정확한 통계를 집계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사라예보 포위 중 300,000-350,000 명이 갇혔고,

이 중에서 60,000-70,000 명의 세르비안 인들이 보스니아에 머물렀다.

4년간의 포위중에 1,600명의 어린이를 포함해서 10,000명이 사망했고,

약 60,000-70,000명이 부상을 입었다.

 

  

 

 

 

2편에 소개된 포위 중에 숨진 어린이를 기리는 기념비에서 언덕을 올라 가서...

 

오스트리아 대사관(왼편) 그리고 전쟁의 잔상이 남은 이웃집...

 

 

프랑스 대사관과 그리고 전쟁 중에 사망한 군인들을 기리는 조각상이 보인다.

 

 

대사관 주위의 아파트 건물들...  

하나같이 여전히 남은 전쟁의 잔상과 베란다에 핀 아름다운 꽃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왼편 길로 들어섰더니 깔끔하게 단장된 이태리 대사관이 눈에 들어 온다.

 

 

도시 중심가에 있는 크리스찬들의 묘지...

 

 

Habsburg 풍의 번잡한 페르하디아(Ferhadija) 거리

 

 

Liberation and Izetbegovic Square 공원에서 서점과 미술품을 파는 가게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체스게임을 즐기는 시민들..

 

 

바로 뒤에 Serbian Orthodox Cathedral(세르비아 정교회 대성당)이 서 있다.

이 교회는 오토만 제국 통치중인 1863-1869년 사이에 지어졌는데

특이하게도 이 건물비용을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의 로마노브 왕가,

오토만 술탄, 세르비아의 왕자가 함께 조달을 했는데

건축양식도 다문화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예수성심 대성당 뒷편

 

그리고 교회 벽에 남은 총탄 흔적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4대 종교건물인 모스크, 성당, 시나고그와 정교회 교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에

앞으로 예전처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지내기를 잠시 기도를 드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알리 파샤(Alipasina )모스크에

많은 신자들이 손과 발을 깨끗이 씻은 후에 기도를 하러 안으로 들어 가고 있다.

 

 

모스크 바로 건너 편에는 평범하게 보이는 대통령 관저가 있다.

이 건물은 보스니아를 상징으로 전쟁 중에 가장 총격을 많이 받은 건물로 세르비아 군인들이

45 미터까지 전방까지 밀고 들어왔지만 가까스로 보스니아 군인들이 지킨 건물이다.

 

 

바로 옆에는 보스니아 Kanton 빌딩...

 

 

아직도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는 전차...

 

 

싱싱한 과일과 채소를 파는 청과시장이 보여서...

 

 

더운 날씨라서 계속 땀으로 뺏긴 수분을 채우기 위해서 레스베리, 복숭아와 포도를 사들고

단 주스가 주르륵 흐르는 포도를 씹으면서 계속 도시의 서쪽으로 향했다.

 

 

Marijin Dvor(마리인 도보르 빌딩)

지금은 초라하게 보이는 이 건물은 합스부그르 통치 시대인 1895년에

귀족의 부인을 위해서 지어진 궁이었다.

 

 

 

계속 서쪽으로 가면 'Sniper Alley"(저격수의 골목)이라는 불리는 동네가 나온다.

 

제일 먼저 성 요셉 성당이 나온다.

 

전쟁당시 이 성당 왼편에 위한 이 거리는 늘 저격수들이 지키고 있는 거리에 있어서

죽을 힘을 다해서 뛰어가야 하는 거리였다.

 

 

위의 거리에서 왼편으로 가면 유명한 홀리데이 인 이 나온다.

이 호텔은 1984년에 개최된 사라예보 올림픽 경기를 참관하러 오는 유명인사와 귀빈이 머물 수 있는

호텔로 지어졌지만, 10년이 채 되지 않아서 보스니아의 전쟁을 선포하는 첫 총성이 울린 곳으로 변했다.

1992년 4월 5일에 카라드지치가 이 호텔에 저격수들을 배치해 두고 아무에게나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에게 무차별로 쏘라는 명령을 내린 곳이다.

 

얼마 후엔,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서 각국에서 보낸 보도진과 정치인들이 이 곳에 머물게 되면서

사라예보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건물이 되었다.

 

 

바로 길 건너편에 현대식의 고층 빌딩이 올라가고 있다.

 

 

보수공사 중인 박물관 건물

 

 

어느 성보다 견고하게 지어진 새로 건축된 미국 대사관...

(이 건물 사진촬영은 절대금지라는 것을 나중에 길을 건너서야 알게 되었지만...)

 

 

미 대사관 바로 옆에는 아직도 총탄이 그대로 남은 사라예보 대학 건물이 위치 해 있다.

 

 

서너 건물은 이렇게나마 땜질을 하기도 했다.

 

 

다시 길을 건너서 가 본 길에는 폐가가 된 한 박물관에 알록달록한 장갑이 달린 것이 눈에 들어 와서

배경이 궁금해서 잠시 올려 다 보았지만, 영...

 

 

오른쪽에 전쟁 중에 제일 위험해서 무인지대였던 미 대통령 이름을 딴 윌슨거리가 나온다.

 

 

지금은 나무가 울창한 산책로과 공원으로 변했다.

 

 

전쟁의 잔상으로 당시 쓰여졌던 무기들이 공원에 전시 되어있다.

 

 

윌슨 산책로는 사라예보를 동서로 가로 지르는 밀야캬 강 산책로로 이어진다.

 

 

마침 34도의 무더위에 몇시간을 걸어 다니느라 흘러 내리는 땀을 잠시 식혀 주었다.

 

 

이 개천에 가까운 강을 잇는 다리가 다수 있는데

다리마다 이렇게 자물쇠가 많이 달려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증명하고 오랫동안 지키려는 의도로

 자물쇠에 두 연인의 이름을 적어서 이렇게 다리에 달아 놓았다.

 

 

평범하게 보이는 많은 다리 중에서, 두개의 다리가 특히 잘 알려졌다.

 

 

그저 평범한 이 다리는 라틴 다리라고 불리우는데,

1914년 6월 28일에 이곳을 공식 방문한  합스부르그 왕조의 페르디난드 공작과 그의 부인 소피아가

새르비아 출신 19세의 Princip에 의해서 저격당해서, 결과적으로 세계 1차 대전을 유발한 시킨 장소이다.

 

 

저 앞에 보이는 다리는...

 

일명 로미오 & 쥴리엣 다리라고 불리워지는 이 다리의 정식이름은

이 작은 기념비에 새겨진 두 젊은 아가씨의 이름을 따서 "수아다 딜베로비치 & 올가 수치치 다리" 이다.

딜로비치 양은 두브로브니키 태생으로 당시 사라예보 대학를 다니는 의대생이었고,

수치치 양도 크로애시아 출신으로 사라예보에 살고 있었는데,

이 다리를 건너다가 위의 홀리데이 인에서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서 숨졌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다리로 널리 알려진 배경은

당시 연인이던 보스니아 출신인 아드미라 이스미치 양과 세르비아 출신인 보쉬코 크르키치 군이

위험한 사라예보에서 더 좋은 세상으로 탈출하고자 1993년 5월 19일에

이 다리를 함께 건너다가 역시 저격수에 의해서 둘 다 총상을 입었다.

보쉬코군은 바로 즉사했고, 아드미라 양은 사랑하는 보쉬코 곁으로 기어가서 , 그의 팔에 안겨서 얼마 후에 사망했다.

 

하지만 저격수들의 총격이 두려운 나머지, 아무도 두 시신을 거두지 못하고

일주일간 서로 안긴 채로 다리에 방치되었다가, 4일 후에 미국 전쟁 기자인 Kurt Schork 씨가

이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 기사가 전세계에 널리 나가면서 시신도 거두게 되고

영화와 노래로 그들의 슬픈 사랑 얘기가 오랫동안 주목을 받았다.

 

 

일단 어제 갔던 식당에서 1500원 밖에 하지 않은 시원한 맥주와 함께

저녁 식사를 푸짐하게 들면서 하루 종일 쏘다닌 피로와 허기를 해소했다.

 

 

 

저녁 식사후에 sunset를 알리는 산 꼭대기 이야기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