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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me...Helen/헬렌의 일상에서

성 요셉 주교좌 성당에서... A cantor at the St. Joseph's Basilica

by Helen of Troy 2016. 9. 17.




성 요셉 주교좌 성당 (2016년 9월 13일 정오미사 전에)



 

성요셉 주교좌 성당 외부 모습 


 

한달 전부터 에드먼튼 대교구의  성 요셉 주교좌 성당에서

Cantor 봉사를 시작했다.


보통 주중 미사중에는  오르간 반주와 성가대가 성가를 부르지 않기에

신자들이 성가를 제대로 부를 수 있도록 도와 주기 위해서

cantor가 제대 앞에 서서 마이크를 사용해서

그날 미사중에 부를 그레고리 챈트(chant) 기도문과 성가를 리드하는데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정오미사에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입구 오른편에 있는 작은 기도 공간



에드먼턴 캐톨릭 대교구 역사는 광활한 서부 캐나다가

아직 정식 주(province)로 승격이 되기 전,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기에

캐나다의 무역을 장악했던 허드슨 베이 컴퍼니(Hudson Bay Company)가

이 광대한 서부 지역을 관리할때에,  자치령(territory) 이었을때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 이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냥, 낚시로 생활하던 원주민들이었으며,

에드먼튼 성(Fort Edmonton)은 Hudson Bay Company의 가장 중요한 무역과

물물교환을 이루어지는 상업의 중심지역으로, 특히 값비싼 모피가 대량으로 거래되었다.

대부분 동부 캐나다에서 서부로 탐험과 개척을 위해서

많은 모험과 명예, 그리고 부를 찾고자 하는 프랑스 출신 캐톨릭 신자들이 건너왔는데,

그 과정에서 원주민들과의 모피거래를 위해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원주민 여성들과의 결혼과 동거를 해서 태어난

(그래서 불어와 캐톨릭교도 물려주게 되고) 프랑스인 남성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메이티스(Metis: 불어로 반반혼혈) 자녀들이

허드슨 베이 컴퍼니의 무역사업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포트 에드먼튼 무역거래소의 직원들도 대부분 불어를 구사하는 캐톨릭 신자였다.


1822년에 레드리버에 위치한 새로운 정착지에 선교사였던 노베르 프로방쉐 신부님이

퀘백 대교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어서

캐나다의 오대호의 서쪽에서 태평양까지, 그리고 미국국경부터 북극해까지에 달하는

현재 캐나다 면적의 65%에 달하는 광대한 미 개척지를 주관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12시 미사 시작하기 15분 전에...

 


1838년에 블랑쉐 신부와 데메르 신부가 퀘백에서 4,000 km 떨어진 태평양 연안쪽으로 가는 길에

포트 에드먼튼(Fort Edmonton)을 방문해서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했고,

어린이들에게 영세세례를 주었고, 혼배미사를 받지 못한 부부들에게 정식으로 미사를 집전해 주었다.

이곳에서 좋은 인상을 받은 그들은 프로방쉐르 보좌주교님에게

포트 에드먼튼의 상황을 보고하게 되었고,

1843년에 락 상 안(Lac Ste. Anne: Lake Saint Anne) 동네에 첫 공소가 생겨났고,

1859년에는 포트 에드먼턴  성내에 작은 목조캐빈 채플이 건립되었다.


1861년에 알버트 라콤(Albert Lacombe) 신부가 캐나다 광활한 서부에 첫 공소중 하나인

세인트 알버트 공소(St. Albert Mission)와 정착지를 세워서

원주민과 혼혈인 크리(Cree) 족과 메이티스(Metis) 부족들을 위해서

 그들의 신앙생활을 도왔고, 교육과 의료혜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때 세운 채플은 알버타에서 가장 오래된 빌딩으로 지금은 주립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제대 양 옆에 있는 두개의 채플에서는 열심한 신자들이 구일기도를 받치고 있다.

 

당시 원주민들의 토지문제와 열악한 교육 환경, 급격하게 감소된 식량조달로 굶주림,

그리고 유럽에서 다양한 나라에서 대거로 서부로 이주한 백인들에 비해서 모자라는 성직자들,

학교와 병원, 교회 등등 이유로  1871년에 세인트 알버트 교구가 새로 창설되었다.

1889년에는 세인트 알버트 교구에서 사스카추언 지역은 독립을 해서 떨어져 나갔고,

수천년동안 원주민들의 식량뿐 아니라 의복과 주거지까지 해결해 주었던

버펄로가 완전히 멸종하게 되자, 캐나다 정부는 조약에 서명한 원주민들에게

일정한 크기의 토지를 제공하게 되면서, 캐나다 정부가 그들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막 이민온 백인들과 원주민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학교와 병원을

노약자들을 위해서 요양원을 세우기 위해서

캐톨릭 남녀 선교사들이 이 지역으로 도착했다.

그들은 광활한 평원에 멀찌감치 널린 많은 가정을 방문해서 집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성당 미사에 참여하고, 성당에 딸린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라고 권유를 했다.

세인트 알버트 교구의 첫 주교였던 비탈 그랜딘 주교님은 길고 추운 겨울에도 불구하고

스노우 슈즈를 신고 42,000 km를 걸어서 광활한 교구 소속 신자들을 일일이 방문할 정도로

열심히 신자들을 돌보신 덕분인지, 1902년 당시 42명의 서품받은 신부님들과

10명의 종신부제 서품을 받은 신부님, 30개의 본당에 18,000명의 신자의 교구로 성장했다.



 

  성당 왼편 벽에는 12 사도, 그리고 제대 바로 뒤 중간에는 예수님,

그리고 오른편에는 성 요셉등 성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환한 햇빛에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1912년 11월 30일에 세인트 알버트 교구는 에드먼튼 대교구로 승격되면서,

예전 교구의 남부는 캘러리 교구로 분리되어 나갔고,

에드먼튼 대교구의 첫 대주교님으로 에밀 리갈(Emile Legal) 신부님이 부임해서,

그가 1920년에 타계할 즈음에는 55개의 본당, 58개의 공소를 위해서

92명의 신부님과 28명의 부제들이 38,400명의 신자들을 위해서 사목활동을 했다.



 

 

에드먼튼 대교구는 1차 세계 대전 종전후 빠른 성장을 하면서,

1921년에는 대교구 캐톨릭 신문이 발간되기 시작했고,

1925년에 성 요셉 대성당의 지하층이 지어졌고,

1926년에는 성요셉 캐톨릭 대학교도 설립되었고,

1927년에는 대학교내의 신학대에 학생들을 받기 시작했다.

대교구 소속된 지역이 여전히 너무 광활하고 신자수도 증가하게 되어서

1948년에 교구의 북부 지역을 세인트 폴(St. Paul) 교구로 지정해서 독립했다.


현재 에드먼튼 교구는 에드먼튼 시와

그리고  서쪽은 로키산맥부터 동쪽에 위치한 사스카추언 주까지,

남쪽은 Olds 부터 북부에 위치한 Mayerthorpe 시를 포함해서 81,151 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그리고 61개의 상주하시는 주임신부님이 사목하는 본당과,

상주 주임신부님이 안 계시는 64개의 본당과 공소가 있고,

9개의 캐톨릭 학교 구역과, 10개의 캐톨릭 병원이 신자, 학생, 환자와 노인들을 돌보고 있다.


성요셉 성당은 주중에는 매일 세번에 걸친 미사가 있고,

일요일에는 14개의 언어(불어, 스페인어, 폴란드어, 중국어, 크로애시언, 포르투칼어,

월남어, 이탈리언, 독일어, 헝가리어, 한국어, 라틴어, 수화)로 미사가 집전된다.







만 14살부터 성가대에 들어가서, 49살까지

토론토 한인성당, 서울 외국인 성당, 뉴저지 포트리 성당,

필라델피아 한인성당, 에드먼튼 한인성당, 성 토마스 모어 성당에서

성당 오르갠 반주부터 시작해서,  소프라노와 알토 성가대원으로,

그리고 지휘자까지 두루두루 35년간 봉사를 해 왔다.


그러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시 쉰다는 것이

수년이 순식간에 흘러 버리고 말았다.

3년 전부터 다시 성가 봉사를 할 기회가 생겼지만,

바쁜 스케줄에 맞출 수가 없어서 계속 미루고 있다가

뜨뜨무리 해진 기도와 신앙생활도 좀 더 제대로 하고 싶기도 하고,

신으로부터  거저 받은 탈렌트를  필요로 한데에

아직 건강해서 좋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에 사용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cantor 봉사를 권유하는 한 자매님의 부탁을 기꺼이 소명으로 받아 들이기로 하고,

한달 전부터 성가 봉사를 시작했다.


매일 바뀌는 성서 내용에 따라서 거기에 알맞는

기도대신에 부르는 그레고리안 chant와 성가를 골라야 하기에

따라서 매일 성서읽기에도 충실해졌다.

그리고 합창이 아닌 독창으로, 그것도 반주없이 아카펠라로

음정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신자들을 리드해야 하기에

최상의 기도라는 성가를 제대로 부르기 위해서

노래 연습도 정기적으로 꾸준히 할 수 있게 되어서

일석삼조인 cantor 봉사활동을 작심삼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처음과 같은 열정과 믿음으로 충실히 해 나갈 수 있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