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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me...Helen/헬렌의 일상에서

나의 스승이자 멘토이신 프랭클린(Ursula Franklin)박사님의 타계 소식을 듣고...

by Helen of Troy 2016. 9. 8.


어제 화요일 저녁에 긴 여름 휴가를 뒤로 하고,

 2016-2017년 시즌 첫 합창연습이 있어서

연습 장소인 알버타 대학교 음대건물에 들어서니

일찌감치 미리 도착한 멤버들이2달 반만에 만나서

서로 밀린 이야기를 신나게 나누고 있었다.


우선 줄을 서서 일년회비를 내고 올해 초반에 공연될 여러 악보를 건네 받았다.

이날 악보를 나누어 주는 일을 하는 일을 맡았고 20년간 함께 합창을 한 마이크가

악보 외에 무엇인가를 슬쩍 끼워 넣어 주어서, 내 자리에 앉아서 일단 무엇인가 궁금해서 보았더니

대학교때의 지도교수였던 프랭클린 박사의 타계소식과 부고가 담긴 신문기사였다.



프랭클린 박사는 내가  음대 3학년을 마치고,

다행히 고등학교 수학과 과학성적이 우수해서

공대 내에서도 기피하는 연구와 박사학위를 목표로 하는

Engineering Science 과에 겁도없이 편입해서 가 보니

99.9%가 남자였고, 여자 화장실도

1층에만 스태프을 위해서 있고,

짓굳은 남자들 텃세와 한동안 손을 놓았던 수학과

과학 공부에가 버거워서 잔뜩 움추려 들었던 나를

어떻게 아셨는지 따로 그녀의 사무실로 불러서

차를 권하면서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서로 나누기 시작해서 과의 유일한 여자교수와

여학생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Engineering Science 과 학생들은

2학년때부터 전공을 택해야 하는데,

그때도 1:1로 지도교수를 자청한 프랭클린 박사의

조언을 따라서 재료공학으로 정했고,

2년이 걸린 졸업논문도 그녀의 끊임없는 격려와 도움으로

생명재료공학 분야의

인공뼈와 관절에 관해서 쓴 논문도

무난히 잘 통과하게 해 주신 분이셨다.


동양에서 온 연약한 여학생을 바쁘신 가운데에

따스하게 제자로, 때로는 친구로 대해 주셨고,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스승이셨고,

험하고 긴 인생 여정길을 잘 걸어 나갈 수 있게

환한 불을 켜 주신 등대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직접 행동으로 보여 주신 멘토이신

그녀의 타계 소식이 실린 기사를 읽고, 먹먹해진 가슴때문에

한동안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가 없었다.


마침 뒤에 앉은 마이크가(그 또한 옥스포드에서 재료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오랫동안 프랭클린 박사와 함께 연구를 해 온 사이이다.) 내 어깨를 다독거려 주면서

우리 둘 다 그녀와 인연이 닿은 자체가 축복이고 선물이니, 우리는 참 운이 좋다고 하면서,

7월 22일 토론토에서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추모식은 아직도 준비단계에 있는데

그는 갈 예정이라고 하면서 내 몫까지 그녀의 삶을 축하해 주고,

영면하길 빌어 주겠다고 해 주셔서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Ursula Franklin, pictured in 2006
(Fred Lum/The Globe and Mail)




어설라 마르티우스 프랭클린 박사는 캐나다가 자랑하는 권위있는 원로 과학자이자,

나를 비롯해서 수많은 제자들을 지도한 존경받는 교육자시며, 

정치와 사회적인 이슈를 바로 잡는 열정적인 사회운동가였으며,

캐나다 사회의 여성의 권리를 위해서 애 써온 패미니스트이자

양심와 정의편에서 서서 평화를 지향하는 평화주의자로 평생 몸 바친 분이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그녀의 어머니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어머니 친척들은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았고,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녀는 나찌 노동수용소에 끌려가서 사역을 하면서도 살아남았다.

그 후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죽어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생존한

그녀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었지만,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살어났지요.

근본적인 이슈는 : 기가 막힐 정도로 운좋게 건진 목숨을

어떻게 책임감을 가지고 내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소중한 생명이 갈수도 있는데

내가 그 생명을 얻었으니, 당연히 세상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한다." 라는 것을 잊지 않고

그녀는 선물처럼 덤으로 얻은 삶을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긴 평생을 열정적으로 산 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과학자로서도 그녀의 본문을 잊지 않고,

70년에 가까운 연구활동도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평화적으로 쓰여져서

인간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분야에 국한되었다.


그녀는 토론토 대학교에서 최초의 여자 교수이자

30여개의 명예 박사학위와 공로상을 받았으며,

캐나다 정부에서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Order of Canada를 수상했으며,

1995년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Ursula Franklin Academy 고등학교도 세워졌다.




어설라 마리아 마르티우스(Ursula Maria Martius)는 1921년 9월 16일에

고고학자이며 루터교 신자였던 아버지와 미술사 학자였던 유태인 어머니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독일 뮨헨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일자(Ilsa)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당시 22세로 대학에 대학중이었던 그녀는 2차대전 종전 무렵에

강제로 노동을 해야하는 수용소에 끌려갔다.

이처럼 종전 무렵에 남보다 늦게 유태인 수용소에 끌려간 이유는

나찌스는 양쪽 부모 둘 다 유태인이 1순위로,

다음으로 아버지쪽만 유태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만 유태인 가족을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 갔기 때문이었다.

그녀 가족은 전쟁 중에 따로 따로 수용되었다가 어렵사리 살아 남았지만

외가쪽 수많은 친척들을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강제 노동 수용소에 끌려 간 그녀는 추운 겨울에 실외에서 폭격으로 파손된

건물을 보수하는 일을 했는데, 몇달간 발과 다리에 걸린 동상으로 고생을 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다리의 임파선 순환에 문제로 평생 고통을 안고 살기도 했다.


종전 후 1948년에 그녀는 베를린 공대에서 실험물리학 박사를 받았다.

원래 그녀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서 역사, 법, 문학 분야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전공과목을 물리학으로 택한 이유를 "수학과 물리학 만이 국가에서

감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밝혔다.


그리고 평화주의자인 그녀는 독일의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지성인들의 모임에 가입하지만,

그녀의 이상과 달리 현실적으로 그녀같은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엄마의 친구 도움으로 장학금도 받고 이민까지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토론토 대학교에

포스트닥터(박사학위 받은 후 연구과정) 자격으로 사회활동가(social activist)를 꿈꾸면서

1949년에 캐나다로 이주했다.


캐나다로 이주한지 얼마 후 그녀는 역시 독일에서 이민 온 엔지니어인 프레드 프랭클린씨를

만나서 곧 평화를 지양하는 Society of Friends(the Quakers) 단체에 가입했고,

둘은 1952년에 결혼했다.

당시 물리학을 전공한 여성도 잘 없을 때에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녀는

최초로 토론토 대학 공대 교수가 되어서도, 궁극적으로 무력이나 군사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연구나 강의를 거절했으며, 대신 새로운 과학 분야인 archaeometry 를 창시했다.

고고학과 재료공학을 합성한 이 학문은 금속공학과 결정학(crystallography)의 대가인 그녀가

두 과학을 바탕으로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유적들의 성분을 분석해서

유적의 나이와 배경은 물론 오래 전 선사시대 사람들이 어떤 기구와

지형을 사용해서 만들었는지까지 알아내서 고대문명사회의 사회적 구조와

문화를 유추해서 제대로 그 사회를 이해하는 학문이다.


프랭클린 박사가 했던 수많은 연구 중에

1960년대에 아기들의 치아에 방사능이 있는 동이원소 strontium-90가

발견되는 연구보고서를 토대로 미국 정부에 대기권에서 행해지는

원자력과 연관되는 다양한 테스트를 중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들한테서도 발견되는 방사능 물질을 보고

그녀는 평화와 공중보건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생존은 서로 친구 사이이든 적이든 

서로 의지하는 입장이기에 우리 모두가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이런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마인드로를 사회운동에도 적용했으며,

캐나다 과학협회의 멤버인 그녀는 환경보호가 지금처럼 큰 이슈가 되기 전인

1970년대에 이미 자원과 자연을 보호하는 연구팀의 팀장을 역임해서

환경보호의 선구자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캐나다 여성의 목소리" 단체와 일하면서 캐나다 의회에 정기적으로

그녀가 연구하고 꼼꼼하게 기록한 화학무기와 생화학무기 연구 현황을 보고해서

무차별로 대량학살이 가능한 무기의 위험성을 기회가 닿는대로 널리 알리고자 애썼다.


그녀는 상원위원이었던 로이스 윌슨여사를 비롯해서 여러 여성 지인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면서

여성도 대학 총장이 될만한 자격이 있고, 캐나다 최고 지성인들의 모임인

Order of Canada 에 여자들도 가입할 수 있다고 여권 신장에 앞섰는데,

특히 똑똑하고 가능성이 있는 수제인데도 더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민족 여성들의 권리를 찾아 주는데 주력했다.


그녀의 삶의  만트라 중에서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이 없는 상태이며,

곧 정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Peace is not the absence of war but the absence of fear,

which is the presence of justice.”)

사회운동을 자주 "지렁이 이론"에 비교하기도 했다.


"땅에서 모든 식물이 절로 싹을 틔우고 자라는 이유는

지렁이들이 그렇게 식물들이 크고 자랄 수 있도록 땅과 흙에 양분도 추가해 주고

필요한 공기가 통할 수 있게 땅을 고르게 준비를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운동가들이 정부에게 끊임없이 정보와 연구자료를 제시하는 일도

지렁이처럼 자양분이 많은 흙을 만드는 일과 같아서,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바꾸지 못하더라도, 그럴 때까지 토론할 계기를 만드는 작업이다.

좋은 흙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견해나 방법, 길이 나올 수 없으니까요."

라고 하면서 희망을 잃지않고 꾸준하게 정계와 학계를

그녀의 꿋꿋한 신념으로 변화시키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땅 속에서 준비작업만 하던 지렁이도 땅 위로 올라온 적이 있는데,

1997년에 토론토 대학교에 잘 알려진 한 후원자의 입김으로

부시 대통령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대학교 공식적인 행사에서

공식적인 아카데미 가운을 입고 이 행사에 참가한 프랭클린 박사는

졸업식에 쓰는 평평한 모자를 흔들면서 27명의 동료교수들을 독려해서

행사가 진행된 대학교 졸업식장(Convocation Hall) 밖에 모여서

전쟁을 반대하는 수천명의 시위자들을 비롯해서 이 행사를 티비로 지켜 보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식장을 퇴장한 사건이다.


그녀는 70이 다 된 나이에 지난 25년간 토론토 대학교 소속 매씨 컬리지(Massey College)에서

interdisciplinary(둘 이상의 학문을 제휴하는) 대학원에서 수석연구원(senior fellow)로

재직하면서 그녀가 가장 추구하는 환경보호을 위한 연구를 계속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녀는 90세까지 자주 연사로 초빙되어서 그녀의 해박한 지식과 유머로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를 변화시키기도 했으며,

그녀의 사무실은 늘 많은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90을 바라보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많은 학생들의 우상이자 멘토였다.

그녀는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찾아오는 학생들의 차를 끓여서 대접하면서

그들의 고민과 고충,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고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주고, 앞으로 나갈 방향제시와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다. 


프랭클린 박사의 이름을 딴 과학학교는 그녀에게 큰 즐거움이자 자랑이었는데,

학교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커리큘럼 설정에도 관여하고, 그녀의 집에

선생님들과 스태프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하면서 수업에 관한 토론도 하고

학교에 자주 찾아가서 학생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렇게 외부에 알려진 면 외에도 프랭클린 박사는 지성적인 토론을 즐겨했고,

과학의 논리와 특히 열역학 이론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했으며

미술과 시, 클래식 음악도 그녀가 생전에 좋아하던 것들이었다.

토론토 북쪽 무스코카에 있는 별장을 즐겨 찾아서 정원가꾸기에 열심이셨고,

노안으로 눈이 안 보일때까지 뜨게질을 즐겨 하셨다고 한다.


오랜 지인인 쥰 콜우드 씨가 프랭클린 박사에게 어떻게 긴 세월동안

양심과 도덕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더니

그녀는 "그것은 악기를 조율하는 것과 같지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려면

듣는 것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자기만의 소리를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불협화음도 들을 수 있지요.

그처럼 우리도 책임감있고 양심적인 것을 보는 눈과 귀가 열리구요.

내가 믿는 퀘이커(Quakers) 종교는 creed(사도신경)도 없고,

어느 서류에도 서명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있고 없고는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확실하게 증명이 되듯이

노래할 때처럼 당신이 처한 모든 상황헤서 '내가 과연 음정이 맞는가?(Am I in tune?)'

를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녀의 유족으로 남편 프레드, 아들 마틴, 딸 모니카와 4명의 손자손녀가 있다.

그녀의 특별하고 긴 삶을 기리는 추모식은 9월 말이나 10월 초에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95년간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시려고

열정적으로 사신 프랭클린 박사님,

이제는 천상에서 편히 쉬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