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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 Places/캐나다에서

12월 6일은 핼리팩스 대폭발 사건 100주년-The Halifax Explosion 100th Anniversary

by Helen of Troy 2017. 12. 7.



캐나다 우편국은 핼리팩스 폭발 사건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발행한 기념 우표



오늘은 캐나다 동부에 위치한 노바 스코시아 주의 수도

핼리팩스 항구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핼리팩스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Halifax Explosion


1917년 12월 6일에 캐나다 동부에 위치한 노바 스코시아 주의 수도 핼리팩스 항구에서

두 척의 배가 충돌해서 인위적으로 발생한 폭발사고 중에 

최대 규모의 대형 참사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핼리팩스의 항구 모습

항구 북쪽에 Bedford Basin과

 충돌사고가 발생한 좁은 해협(화살표)가 보인다.



이 폭발 사고와 후에 발생한 쓰나미로 핼리팩스 북부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약 2,000명이 사망했고, 9,000여명이 부상을 입었고,

한 겨울에 25,000명이 주거지를 잃고 홈레스가 되기도 했다.



사고 당시의 핼리팩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지 3년이 지난 1917년 당시

핼리팩스는 캐나다의 최대 항구로, 

캐나다 군인들이 전사하고 부상을 입게 되지만, 

핼리팩스는 수심이 깊기도 하고, 겨울에도 얼어붙지 않아서

북미에서  항구로서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미항으로

1차 대전 중 수만명의 캐나다 군인을 비롯해서 영연방 국가와 미국 군인들과

물자를 유럽으로 운반하는 주요한 항구로 부상하게 되면서

오히려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전시 중에 북미에서 철로로 운반된 필요한 

곡식, 목재, 석탄, 음식과 각종 무기등 전시 물자와

캐나다, 영국, 영연방 국가들과 미국 출신 군인들을 유럽과 북미 사이를 운송하고,

뿐만 아니라 캐나다의 해군의 군함기지가 이곳에 주둔해 있었고,

세계에서 물자를 운송하는 수많은 상선들이 항구에 정박해서 필요한 수리도 하고,

항해하는데 필요한 물자를 이 항구에서 조달하는 항구로 변모했다.


따라서 캐나다와 미국 전역에서 항만과, 철로, 제당공장과 다양한 공장에서

취업을 하기 위해서 핼리팩스로 몰려 들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나가게 되면서,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여성들까지 일터로 나가서 부족한 일손을 채울 정도로 도시의 경제가 활발해졌다.


이렇게 전시 덕분에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서 세워진 공장들의 대부분은

항구에서 가까운 핼리팩스 도시의 북부인 리치몬드 동네에 운집되었다.

리치몬드는 비포장 도로로  공장들, 해군 기지, 항만시설

여러 갈래의 철로가 있는 핼리팩스 항구로 이어져 있고 

소박하고 자그마한 목조 주택에서 주민들이 똘똘 뭉쳐 사는 전형적인 블루칼러 동네였다.

리치몬드에서 조금 더 북쪽에 위치한 아프릭빌(Africville)은 흑인들이 몰려 살았고,

항구의 건너편에 있는 다트머스(Dartmouth) 해변에 위치한 터틀 그로브(Turtle Grove) 동네엔

이 지역의 원주민인 미크매크(Mi'kmaq) 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미크매크 원주민들은 핼리팩스 항구를 '체북토' 혹은 '키푹툭' 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최고의 항구'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1차 세계대전 전시 중에 

독일군들이 침략해서 핼리팩스를 폭격할 올 것이라고 믿었기에, 

항구 곳곳에 초소를 지어서 망을 보게 했고,

다수의 대포와 총을 발사할 작은 요새도 설치했다.

아울러 독일군의 잠수함 접근을 막기위해서, 해저 네트도 설치하기도 했다.


 

Imo and Mont-Blanc


1917년 12월 초에 핼리팩스 항구에 정박해 있던  노르웨이 상선 'Imo' 는

전시에 큰 피해를 입은 벨지움으로 보낼 구호 물자를 싣고 뉴욕 항을 떠나서

유럽으로 가기 전에 핼리팩스 항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또 하나의 배는 프랑스 국적의 무기와 화약을 운반하는

몽블랑('Mont-Blanc') 무기선박이었는데,

수만 톤의 벤졸, 아주 폭발성이 높은 피크르산(Picric Acid)과 

만톤의 TNT 그리고 총 목화를 싣고 핼리팩스 항으로 들어 오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군대가 아니라 일반인이 항구를 운영할 때에는

무기나 화약을 운반하는 배는 항구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1차 대전 시에는 영국 해군이 항구를 콘트롤하게 되면서 

엄청난 화약과 무기를 실은 몽블랑같은 위험한 배가 핼리팩스의 안쪽인

벧포드 하구(Bedford Basin)으로 진입하는 것을 허락했다.


벨지움으로 가는 구호물자를 실은 '이모'는 1917년 12월 아침에

통상적으로 항구를 떠날 때에 핼리팩스 도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하기 보다는

벧포드 베이신 남쪽에서 다트머스 해안이 있는 동쪽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가장 좁은 해협을 통과하려고 했다.

평상시에는 이 좁은 해협을 안전하게 통과하려면,

들어오는 배가 나가는 배의 오른쪽 혹은 우현쪽(starboard)으로

통과할 수 있도록 코스로 이동하는 항구의 법규가 있는데,

선장인 윌리엄 헤이즈씨는 오랜 경험이 있는 선장이었지만,

전날 이례적으로 두척의 배가 동시에 이 법규의 반대방향으로 

이 해협으로 서로 이동하는 바람에 항구에서 너무 동쪽으로 치우쳐서

배가 반대방향으로 항구에 닻을 내린 상태였다.


한편 엄청난 양의 화약과 무기를 실은 '몽블랑' 배는 그 충돌사건 하루 전인 12월 5일에 

항구와 인접한 곳에 닻을 내리고 하루 밤을 정박한 후에 다음날 아침에

위험물질을 운반하는 배의 특별한 법규나 프로토콜이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항만청으로부터 항구 안쪽으로 이동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벧포드 베이신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날 아침에는 '몽블랑'이 안전하게 이 해협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이모'같은 다른 배들의 이동 금지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몽블랑'의 프란시스 매케이 선장은 다트머스 쪽 해협을 조심스럽게 통과하는 중에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모'가 '몽블랑' 의 항로로 빠른 속도로 직진해 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후에 매케이 선장은 늘 들어오는 배가 나가는 배보다 순위가 먼저이며

'이모'가 너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고 진술했는데, 비록 그의 증언이 일방적이라 해도

'이모'의 항로는 너무 동쪽에 치우쳐져서 '몽블랑'의 항로를 침범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을 알아차린 두배에 탔던 선장과 갑판원들은 서로 호르라기를 불면서

경고도 하고 항로변경을 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로 충돌하고 말았다.

충돌 직후에 두 배가 잠시 떨어졌고, '몽블랑'의 선체의 구멍이 나면서 발생한

스파크는 배 아래에 실은 폭발성이 높은 화약과 피크리 산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몽블랑은 20분간 불에 탔고, 이 불은 갑판 위에 실은 가솔린 형태의 벤졸로 번지면서

시꺼먼 연기와 함께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러자 항구에 주둔했던 소방수들과 다른배에 타고 있던 많은 선원들이

불에 휩쌓인 몽블랑의 불을 끄기 위해서 몽블랑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항만청의 직원과 해군 장교, 그리고 몽블랑의 선장과ㅏ

몽블랑의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선원들 외에는 몽블랑의 위험을 알지 못했다.

이 상황을 알고 있는 몽블랑의 선원들과 선장은 구명보트에 옮겨타고

다트머스 쪽의 항구로 죽을 힘을 다해서 노를 저어서 몽블랑에서 달아났고,

그 와중에 불에 타고 있는 몽블랑은 핼리팩스 항구에서 주택과, 상가가 운집해 있고,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기도 하고 로얄 해군 사관학교와 커다란 설탕제조회사가 있는

 6번 부도쪽으로 흘러 갔다.




Vincent Coleman


핼리팩스 쪽에서 불에 타고 있는 몽블랑이 곧 폭발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철도회사 직원인 빈센트 콜먼과 항만 직원 윌리엄 러베트였는데,

러베트씨는 항구 하역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빨리 피하라고 경고를 했다.


콜먼씨는 피하려고 하다가 뉴 브런스위크의 세인트 존에서 수맥명의 승객을 태우고 출발해서 

8시 55분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기차를 기억하고 그의 자리를 지키면서,

"화약을 실은 배에 화재가 발생해서 6분 부두로 이동한다. 굿바이." 라는 전보를 쳐서

핼리팩스 역으로 이동하는 모든 열차의 진입을 막았다.


세인트 존에서 떠난 열차는 이 전보때문이 아니라 도착 시간이 늦어져서 안전했지만,

이 전보를 보내기 위해서 자리를 떠나지 않은 콜먼씨는 결국 폭발로 사망했고,

그의 보낸 전보는 핼리팩스의 폭발사건을 외부에 널리 알리는 첫 경고였다.

 

 

충돌과 폭발


불에 타고 있던 몽블랑은 9시 4분 35초에 결국 엄청난 화약의 폭발로 이어졌는데

엄청난 파워와 충격여파가 사방으로 번졌고, 이어서 거대한 쓰나미를 유발해서

핼리팩스와 다트머스 해변을 덮쳤다.


이 폭발로 리치몬드 동네의 2.6 제곱 킬로미터나 되는 면적이 초토화되었고,

항구 주위에 있던 집, 사무실, 교회, 공장, 선박들, 기차역, 창고, 하역 지역과

사람들도 직접적인 폭발과 쓰나미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몽블랑의 폭발로 핼리팩스에서 100 km가 떨어진 트루로의 건물 창이 박살이 났고,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주에서까지 폭발음이 크게 들렸고,

미국의 매사추세츠 해안에서 어업을 하던 선원들에게 들릴 정도로 

폭발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 할만큼 대단했다.


폭발한 몽블랑은 큰 화염에 둘려쌓였고, 바로 기화되어서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배의 커다란 닻의 일부는 핼리팩스 도시를 넘어서 4 km 떨어진 곳으로 날라가서

현재도 떨어진  그 지점에 에 전시되어있다.


충돌한 이모는 다트머스의 해변가를 장난감처럼 휘둘렸고,

불에 탄 몽블랑의 금속잔재들과 검은 비와 탄소 입자들로 항구가 그득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 역시 폭발과 함께 하늘로 날랐는데,

어디에 그들이 떨어졌는지에 따라서 생사의 길이 나누어졌다.

'미들햄 캐슬' 에 타고 있던 기관원 찰스 메이어씨는 그의 배에서 1km 떨어진 

리치몬드 언덕 위에 추락했는데  입던 옷은 다 없어지고

부츠만 신고 있었고, 근처에 같이 떨어진 어린 소녀도 혼자서 울고 있었으며,

누군가가 바지와 코트를 건내 주었다고 후에 회고를 하기도 했다.




사고 피해


이 폭발사고로 핼리팩스와 다트머스의 북부 지역은 직접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미크매크 원주민들이 살던 터틀 그로브는 폭발과 후에 발생된 쓰나미로 완전히 사라졌다.


수백명의 어린이를 포함해서 약 1,600명이 바로 즉사했고,

400여명은 폭발로 부상을 입었다가 며칠 후에 사망했다.

1918년 영안실 기록에 따르면 1,631명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는데

그 중 1/3이 1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

2004년에 공식적인 인명 피해를 1,946 명이라고 다시 발표한 바 있다.


아울러 9,000여명이 부상을 입었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깨진 유리 조각때문에 장님이 된 피해자도 속출했다.

1,500여 빌딩이 완전 파손되었고, 12,000개의 빌딩은 부분적인 피해를 입었다.

25,000 명이 집을 잃게 되어서 홈레스가 되었는데,

마침 사고가 겨울에 발생해서 그해의 혹한으로 생존자들은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했다.

피해 금액은 당시 돈으로 약 3천 5백단 달러로 추정되었다.



구조작업


당시 핼리팩스는 이처럼 큰 대형 사고에 대비할 준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사고 전에도 복지제도도 미비해서 대부분 개인이나 교회 단체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당시 핼리팩스 시장은 다른 곳에 가 있었고, 부시장 혼자 구조작업과

피해자들의 복지를 담당해야 했고, 소방청장은 이 사고로 사망했고,

도시의 유일한 펌프 소방차 역시 사고로 파손된 상태였다.


이런 어려움에 처한 상태에서 다행히도 이 도시에 주둔하고 있거나

항구에 정박하고 있거나, 사고 직후에 들어 온 배에 타고 있던 많은 군인들이

뭍으로 내려 와서 앞장 서서 구조작업과 복구작업에 나섰다.

그리고 집을 잃은 홈레스들도 항구에 있던  캐나다와 미국  선박에서

거처하기도 하고, 필요한 의료 치료를 받기도 했다.


핼리팩스를 비롯해서 노바 스코시아 전 지역에서 구조와 복구를 위해서

사고 직후 몰려 들었고, 이 폭발사건은 세계의 주요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캐나다 동부지역과 캐나다 중부와 서부, 그리고 미국의 뉴 잉글랜드에서

떠난 기차들은 의사, 간호사등 의료 스태프, 음식, 옷, 건축자재와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복구와 치료를 위해서 몰려 들었다.


그리고 사고 직후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복구사업을 주관했던

보스턴 소재  Massachusetts-Halifax Relief Committee 위원회의 활약이 컸다.

전 세계에서 후원금이 보내졌는데, 캐나다 정부, 기업들과 개인이

당시로는 큰 총 2천만 달러 보상금이 모금되어서  

1918년에서 1976년까지 사고 피해자들을 위해서

주택, 치료와 재활등에 걸쳐서 보상금이 사용되었다.




사고 경위 조사와 처벌


분노에 찬 피해자들은 당연히 사고의 원인을 알고 싶어했는데,

사고 직후에는 독일군들의 사보타지로 발생했다는 루머들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곧 사법적인 절차를 밟게 되었고, 1918년 2월 4일에 공판에서

드라이스데일 판사는 몽블랑 배에 전적인 책임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몽블랑의 선장과 고위직은 과실치사로 구속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사고 발생 2년 후 1919년에 대법원에 상고되었는데, 이전 판결을 뒤엎고

대법원은 이모와 몽블랑 둘 다에게 책임이 있다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당시 사고 현장과 피해 모습



노르웨이 국가 소유의 증기 선박 '이모가 폭발사건 후에

다트머스 해변에 좌초한 모습

(Nova Scotia Archives & Record Management/Canadian Press)

 

 


 

 



 


 



 






두 배의 충돌 직후의 모습

이 사진들은 당시 핼리팩스에 주둔하고 있던

캐나다 해군 장교였던 빅터 마그너스씨가 담은 사진으로

100년 후인 얼마전에  89세된 그의 딸에 의해서 발견되어서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폭발한 몽블랑의 모습

by Victor Magnus



 

by V. Magnus



 

by V. Magnus


 

by V. Magnus



 

by V. Magnus



 

파손된 핼리팩스 항구



 



 

 


 

 

 

 

 

 





 그리고 100년 후...




 

 폭발 후 몽블랑의 닻의 부분이 현장에서

4 km 떨어진 이곳에 떨어졌는데, 그 자리에 이 기념상이 놓여졌다.



 


찬 겨울비가 내리는데도 사고지점에서 가까운 포트 니덤 사고 기념지에

많은 군중이  오늘 거행된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오늘 거행된 핼리팩스 폭발 100주년을 기념식에서

멜라니 포티에씨가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십자가와 꽃을 헌정하고 있다.



 

항구에서 가까운 언덕에 위치한

포트 니덤 기념지(Fort Needham Memorial site)에 세워진 종탑의 모습.

이곳에서 100주년 기념행사가 오늘 거행되었다.

사진: Andrew Vaughan



 

100년 전에 폭발이 발생한 시간에 종이 울렸고,

같은 시간에 핼리팩스의 유명한 시타델 힐(Citadel Hill)의 대포 소리가

핼리팩스 도시에  울려 퍼지자, 시민들은 1분간 묵념을 했다.